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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양육-부모 간병 짊어진 美 ‘샌드위치 세대’… 코로나 위기에 휘청

입력 | 2020-03-19 03:00:00

[글로벌 현장을 가다]
고령화 속 샌드위치 세대 증가… 양육, 간병, 생계 3중고 시달려
코로나19 사태로 직격탄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캘버리병원에서 한국계 비영리 문화복지단체 ‘이노비(EnoB)‘ 소속 자선봉사자인 꽃꽃이 전문가 채정아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80대 노모를 간병하고 있는 디디 후퍼 씨(왼쪽에서 세 번째) 등 가족 간병인에게 꽃꽃이 요령을 설명하고 있다.

박용 뉴욕 특파원

지난달 24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브롱크스의 캘버리병원. 말기암 환자 등이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이 병원에서 모처럼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국계 비영리 문화복지단체 ‘이노비(EnoB)’가 마련한 꽃꽂이 강좌에 참석한 환자 가족들은 화사한 꽃을 다듬으며 긴 간병의 시름을 잠시 잊는 듯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동포 꽃꽂이 전문가 채정아 씨가 진행한 이날 강좌에서 흑인 여성 디디 후퍼 씨(49)를 만났다. 이 병원에 입원한 82세 어머니를 돌보는 그는 꽃꽂이가 간병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조언에 강좌를 신청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본인 또한 천식 환자지만 주중에는 모친을 돌보고 주말에 브롱크스의 집으로 돌아가 14세 아들과 지낸다. ‘싱글맘’인 자신이 주중에 간병을 하는 동안 뉴욕주 외곽에 거주하는 사촌이 아들을 돌봐준다고 했다. 후퍼 씨는 “어머니 간병, 아들 양육, 생계 문제가 동시에 내 어깨 위에 있다”며 “아픈 어머니를 돌보는 일이 1순위이고 그다음이 아들이다. 나 자신을 챙기는 일은 가장 마지막”이라고 토로했다.

미국에는 후퍼 씨처럼 자녀 양육과 부모나 배우자 간병을 동시에 책임지는 중장년 ‘샌드위치 세대’가 적지 않다. 특히 고령화와 만혼으로 과거보다 부모를 돌봐야 하는 기간이 길어지고 결혼 및 출산 시기 또한 늦어지고 있는데도 정부의 지원 체계가 달라진 사회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이 와중에 미국을 덮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로 간병비가 급증하면서 샌드위치 세대의 부담이 더 커지고 있다.

○ 미 부모 26%가 ‘샌드위치 세대’

‘샌드위치 세대(Sandwich Generation)’란 용어는 1981년 미 여성 사회학자 도로시 밀러와 일레인 브로디가 만들었다. 당시 두 사람은 아이를 돌보는 30, 40대 여성이 부모, 고용주 등의 요구까지 동시에 충족시켜야 하는 상황을 표현하며 이 말을 썼다. 양쪽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라는 의미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이제 남녀 모두 그리고 50, 60대도 ‘샌드위치 세대’에 처할 때가 많아지고 있다. 이에 2006년 메리엄웹스터 사전 또한 이 말을 사전에 포함시켰다.

미 간병협회(NAC)에 따르면 미국인 중 자신의 부모와 18세 미만 자녀를 동시에 돌보는 ‘샌드위치 세대’는 약 1100만 명이다. 전체 부모 중 샌드위치 세대가 차지하는 비중 역시 1999년 12.6%에서 2015년 26.0%로 2배 이상으로 늘었다. 치매 환자인 부모를 돌보는 간병인의 25%가 18세 미만 아이를 두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핵가족화로 과거에 비해 부모를 돌볼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이 줄어든 것도 이들을 힘들게 한다.

약 76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베이비부머(1944∼1963년 출생)의 대부분이 곧 80대에 도달한다는 점도 샌드위치 세대의 어깨를 짓누른다. 베이비부머는 보통 샌드위치 세대의 부모 뻘이다. 샌드위치 세대의 49%가 X세대(1964∼1980년생)이기 때문이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65세 이상 미국인의 약 60%가 최소 2개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즉, 샌드위치 세대는 아래위 세대를 다 돌보느라 자신의 일과 건강에 소홀할 때가 많다. 뉴욕 인근 뉴저지주에서 데이케어센터를 운영하는 데비 코먼 씨는 15세, 17세 두 아들을 키우며 말기암 환자인 남편까지 돌보고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사업은 동업자에게 맡길 때가 많다고 했다. 코먼 씨는 “나 역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쳤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고 호소했다.

NAC에 따르면 가족 간병인의 3분의 2가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주일에 평균 36시간을 일하고 22시간을 부모 간병 및 아이 양육에 쓴다. 특히 일하는 샌드위치 세대 10명 중 6명은 간병을 하느라 지각, 조퇴, 결근, 승진 실패 등을 겪었다. 특히 여성의 정신적 스트레스(38%)가 남성(27%)보다 컸다.

○ 샌드위치 세대 지원이 ‘사회적 거리 두기’ 성공 열쇠

미 50개 주 전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샌드위치 세대의 위기감은 더 커지고 있다. 코로나19는 전염성이 매우 강하고 고령자에게 치명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샌드위치 세대가 부모 건강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역시 흑인 여성인 모들린 이헤지리카 시카고선타임스 칼럼니스트는 13일 “나 역시 93세 노모와 만성 폐렴에 시달리는 28세 아들을 동시에 돌보는 샌드위치 세대”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와 아들 모두 코로나19 감염의 고위험군이기 때문에 우려할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공포가 공포를 키우는 이 상황이 두렵다고 호소했다.

샌드위치 세대 대부분은 외부 활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샌드위치 세대가 감염되면 이들의 부모와 자녀로 번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회 전체의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샌드위치 세대에 여러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너필드칼리지 연구팀은 한국 및 이탈리아의 코로나19 사망자와 인구 구조를 분석한 ‘코로나19 확산과 치사율 이해를 위한 인구통계학적 도움’이라는 논문에서 “코로나19 확산 저지 대책에서 각국의 인구 구조, 세대 간 사회적 연결성 등을 고려해야 한다. 부모와 자녀를 모두 돌보는 샌드위치 세대가 전염 완화의 중요한 고리”라고 주장했다. 연구팀은 “경제적 안정장치가 없으면 샌드위치 세대가 ‘사회적 거리 두기’ 정책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 없다”며 병가 허용, 월세 및 대출금 납부 등을 유예해주는 민관 비상대책을 검토할 필요도 있다고 권고했다.

NAC 역시 샌드위치 세대 지원을 위해 장기 요양시스템을 개선하고 유급 가족 및 병가, 가족 간병인에게 세금 공제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은 뉴욕, 캘리포니아 등 불과 11개 주만 유급 병가를 의무화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노동자의 24%인 약 3360만 명이 유급 병가를 받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음식점 등 서비스업종에 일하는 저임금 시급 노동자다. 코로나19에 감염되거나 감염된 가족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면 곧바로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이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기자회견에서 “코로나바이러스로 피해를 입은 일하는 미국인들이 금융적 역경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고 집에 머물 수 있도록 비상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최근 하원을 통과한 코로나19 지원법안에는 코로나19에 감염된 근로자의 2주간 유급 의료휴가(병가)를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가족이 코로나19에 감염됐거나 자녀들의 학교가 문을 닫아 양육 문제가 발생하면 최대 3개월의 유급 병가도 가능하다.

○ 미 병원도 간병 가족 프로그램 강화

미 주요 병원들은 가족 간병인을 위한 지원 프로그램을 늘려 이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려고 애쓰고 있다. 대다수 간병인이 심한 육체적, 금전적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데 따른 조치다. 특히 연민 및 과도한 감정 소진으로 인한 정서적 피로감을 뜻하는 ‘연민 피로(compassion fatigue)’ 수치가 극한에 다다른 간병인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캘버리병원은 후퍼 씨가 듣고 있는 꽃꽂이 강좌 외에도 요가, 줌바댄스, 악기 연주, 마사지 등 다양한 분야의 강좌를 개설했다. 또 간병인을 위한 전문 상담 코너도 진행하고 있다.

김재연 이노비 사무국장은 “꽃은 개인의 감정조절 능력, 즐거움, 행복감에 영향을 준다. 특히 우울감, 불안감, 분노 등을 다스리는 데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이노비 측이 먼저 캘버리병원에 꽃꽂이 강좌를 제안했으며 간병인들이 직접 만든 꽃꽂이 작품을 소셜미디어 등에 올리면서 큰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고도 전했다.

학계에서도 꽃꽂이 강좌가 간병인의 스트레스 수치를 낮추는 데 효과가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간병인의 피로와 스트레스가 줄어야 환자 역시 긍정적인 기운을 받아 회복 속도가 빨라진다는 의미다. 이런 연구 결과는 미시간주 웨인주립대 심리학연구센터가 만든 전문 학술지 ‘오메가’에도 등재됐다. 캘버리병원 측은 간병인 지원 체계를 일종의 매뉴얼로 만들어 다른 호스피스 병동에 소개하겠다고 밝혔다. 학술지 등재를 확대하고 주요 학술회의에서도 발표할 계획이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