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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내부고발 뒤 체포돼 집안 풍비박산… 법정서 “옳은 것은 옳은 것”

입력 | 2020-03-20 03:00:00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 내 삶 속 동아일보]
<6> 부정선거 첫 폭로 故박재표씨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제보자인 고 박재표 씨의 부인 김선월 씨가 동아일보 사령장 등 고인의 유품을 보여줬다. 천안=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남편은 입버릇처럼 ‘월급쟁이는 한 달 먹을 걸 버는 거지, 두 달 먹을 거 벌겠다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경찰 때도, 신문사 다닐 때도 당당하고 강직했죠. 허풍을 떨면 그대로 믿어 버려 농담도 못 했어요.”

10일 충남 천안 자택에서 만난 김선월 씨(82)는 3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면 답답할 만큼 고지식했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했다. 크지 않은 키에 조용한 성격. ‘정직’이 좌우명이었던 남편은 1956년 동아일보에 경찰의 표 바꿔치기를 고발했던 대한민국 첫 부정선거 폭로자 박재표 씨(1932∼2017·사진)다. 그의 삶을 1972년 동아방송(DBS) 다큐멘터리에 출연해 남긴 육성과 가족 인터뷰 등을 통해 재구성했다.

24세 순경으로 전북 정읍에서 근무하던 박 씨는 1956년 8월 도의원 선거 때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는 일을 맡았다. 임무 중 동료 경찰이 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야당 표를 대거 여당 표로 바꾸는 걸 목격했다. 고민 끝에 사표를 쓰고 서울로 상경해 동아일보를 찾았다.

“사회부장님을 만나 환표(換票) 경위를 말씀드렸습니다. 틀림없냐고 해서 지금 사표를 내고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신문에 크게 나와 있었어요. (더 이상) 고민은 없고 시원한 마음이 들더군요.”(DBS 다큐멘터리 증언)

8월 29일 기사가 실리자 경찰엔 비상이 걸렸다. 근무지 이탈 등을 이유로 체포령을 내리고 현상금 30만 환과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박 씨가 붙잡히자 경찰은 증언을 조작해 1심에서 실형을 받게 했다. 당시 그는 최후 진술에서 “부모와 선배로부터 거짓말을 하라는 말은 못 들었다. 제가 희생되는 건 좋다. 그러나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고 말했다.

2심에서 무죄 판결로 10개월 만에 석방됐지만 내부고발의 대가는 가혹했다. 경찰과 농림부에서 일하던 형제들은 파면됐고 조카들은 학비를 내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박 씨는 어딜 가나 감시 대상이 됐다.

“1959년 초 결혼했는데 선거 때만 되면 병역법 위반이라며 잡아가 군대 훈련을 시켰다. 두 번이나 사라져서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경찰서 등을 돌아다녔다.”(부인 김 씨)

잠시 민주당에 몸담았던 박 씨는 4·19혁명 후 경찰에 복직했다가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민간인이 됐다. 국수가게를 차리는 등 여러 일을 전전하다 의인(義人)의 처지를 안쓰럽게 여긴 동아일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경비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199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자재부 등에서 근무했다.

“회사에서 가끔 마주쳤는데 ‘용감한 순경이었다’고 하더라. 사내에서도 매사 성실하고 틀림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퇴직 후 천안에서 텃밭을 일군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영정사진이 됐다.”(전민조 전 동아일보 출판사진부장)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셨고 휴가 간 동료 대신 근무했다는 얘기를 자랑 삼아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가장 신뢰하는 신문’이라며 동아일보를 보셨다.”(손녀 박선영 CBS PD)

박 씨는 DBS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옛날 회고라는 건 없습니다. 미련도 없고 (다만) 앞으로 내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할 작정입니다.”

천안=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