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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부고란[횡설수설/이진구]

입력 | 2020-03-21 03:00:00


이달 중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의 지역 신문인 ‘레코 디 베르가모’는 10개 면의 부고면을 발행했다. 평소 1∼3개 면인데 코로나19로 사망자가 급증해 150여 명을 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는 가족이 사망하면 신문을 통해 소식을 알리는 문화가 있어 대부분 언론이 홈페이지에 부고(Necrologie)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비용을 내고 고인의 사진과 내용을 보내면 게재해 준다.

▷20일 현재 이탈리아의 코로나19 누적 사망자가 3405명으로 집계되면서 중국의 누적 사망자 3248명을 넘어섰다. 이탈리아는 최근 매일 400명 안팎의 신규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누적 확진자도 4만1000여 명으로 8만여 명인 중국의 절반에 이른다. 폭증하는 사망자로 관혼상제 전통까지 흔들리고 있다. 자가 격리된 가족이 많아 상당수 장례식은 성직자와 장례업체 직원들에 의해 치러지고 있다. 사제가 죽음을 앞둔 병자를 찾아 기도문을 외우며 성유를 발라주는 ‘병자성사(病者聖事)’도 감염 우려로 중지된 곳이 많다.

▷이탈리아의 상황은 의료 인프라 누수를 방치한 공공 의료 체계가 키운 화라는 지적이 많다. 이탈리아 의료 시스템은 공공 의료와 사설 의료로 나뉘는데 공공 의료 체계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공무원으로 간주돼 급여가 사설 병원 의사보다 낮고, 의사 수도 예산에 연동돼 쉽게 늘리기 어렵다. 여기에 보건예산도 줄고 있는 추세라 2005∼2015년 10년간 무려 의사 1만여 명, 간호사 8000여 명이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로 떠났다.

▷공공 의료 전문의 진찰을 받으려면 먼저 주치의를 거쳐야 한다. 주치의가 판단한 4가지 상태에 따라 전문의 진료일이 예약되는데 가장 긴급한 상태도 사흘이 걸릴 수 있다. 다음은 열흘 이내, 그다음은 1∼2개월, 네 번째는 최대 반년 정도가 걸린다. 발병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이런 의료 시스템 탓도 있을 것이다.

▷6000여만 명이 사는 나라에서 사고나 앓고 있던 병 때문이 아니라 돌발적인 전염병으로 하루 400명이 목숨을 잃는 것은 21세기 선진국에선 상상하기 힘든 비극이다. 그래도 이탈리아 도시의 발코니와 창문에는 ‘다 잘될 거야(Andr‘a tutto bene)’라고 적힌 무지개 그림이 곳곳에 걸리고 있는데,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시민들이 서로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발코니에서 노래와 연주로 이웃을 위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상황은 어렵지만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인간만이 가진 특징이다. 언제나 그랬듯, 질병이 인간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진구 논설위원 sys120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