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에 젊은 홍콩인 지휘자 윌슨 응(31)이 선임됐다. 응모한 국내외 지휘자 113명 가운데 선정위원 만장일치의 결과였다. 서울시향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공동 주최한 3·1절 100주년 기념콘서트에서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지휘하며 데뷔한 그는 1년이 지난 최근 다시 ‘영웅’으로 음악 팬의 시선을 모았다. 서울시향이 ‘사회적 거리두기’ 일환으로 마련한 온라인 콘서트 ‘영웅’을 그는 1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의서울시향 연습실에서 지휘했다. 콘서트는 생중계됐다. 지금은 서울시향 유튜브 채널에서 만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위협에 직면해 있죠. 베토벤은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긍정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보여주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20일 서울시향 회의실에서 만난 윌슨 응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에 쓰인 실러의 시 ‘환희에의 송가’를 언급했다. “환희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는 곳에 인류는 하나가 된다고 노래하고 있죠. 베토벤이 난청을 비롯한 인생의 여러 문제와 싸우면서 얻은 결론입니다.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그의 음악이, 마음의 장벽을 쌓는 인류를 다시 묶어주기를 기대합니다.”
올해 11월 27일에는 서울시향의 정기연주회를 처음으로 지휘한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7번, 올해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협연하는 쇼팽의 협주곡, 멘델스존의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를 프로그램으로 골랐다.
“음악은 ‘사이’의 예술이죠. 음표와 음표 사이, 마디 사이, 섹션들 사이의 관계가, 서로 이어주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세 곡은 각각 체코 폴란드 독일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드보르작의 이 교향곡은 ‘기차의 도착’을 묘사하며 멘델스존의 곡은 항해를 그려내죠. 저 스스로 여러 나라를 다니는 방랑자 같은 모습을 표현해보고자 했습니다.”
올해 그는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코리안 심포니 오케스트라, 광주시립 교향악단 지휘 무대도 갖는다. 그러나 나라와 나라를 오가는 ‘방랑’은 잠시 중단이다. 고향 홍콩에서의 콘서트와 4월 중국 본토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투어가 예정돼 있었지만 모두 취소됐다. 그 밖에 생활이 달라진 것?
“서울시향이 연주할 모든 작품을 주의 깊게 연구하고, 모든 연습을 참관합니다. 예정된 지휘자가 입국이나 건강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죠. 작품 연구에는 더 좋은 때죠.”
그 밖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지휘자가 화려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악보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니까요.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악보를 들여다보는 데 쓰죠.” 그는 서울시향이 마련한 세종문화회관 근처의 오피스텔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서울시향은 어떤 악단일까. “나는 행복한 지휘자입니다. 이렇게 수준 높은 악단을 늘 대면하는 귀한 기회를 갖게 되었으니까요. 젊은 지휘자의 성장에 특히 중요한 일이죠.” 그는 “그저 그런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연주자 탓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울시향 같은 오케스트라라면 자신의 약점을 명확하게 알 수 있고 자신에게 정직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향의 개성? 한국은 전통이 살아있는 나라고 사람들의 감정이 풍부하죠. 서울시향도 감정이 풍부한 악단입니다. 어떨 때는 악단이 느끼는 ‘감정’이 저와 다를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분명한 감정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늘 두 생각 사이에서 합의가 나옵니다.” 상임지휘자 오스모 벤스케와 두 수석지휘자의 리허설을 보면서도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운다고 그는 말했다. “특히 오케스트라를 믿고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방법에 대해 이 거장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고 있습니다.”
그에게 늘 궁금한 점이 있었다. 평소에 그는 늘 붉은 바지를 입는다. 이유가 뭘까. “플루티스트로 음악 생활을 시작했어요. 플루트 레슨을 했지만 돈이 부족했죠. 옷가게에 갔더니 좋은 새 바지는 빨간 것 단 한 벌뿐이더군요. 할 수 없이 사서 입었죠.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보기 좋다고 했고, 그 뒤로 운이 계속 따랐어요. 행운의 표시 같아서 늘 붉은 바지를 입죠.” 홍콩에서는 붉은 바지를 쉽게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어디서든 붉은 바지가 눈에 뜨일 때마다 산다. 이제 열 벌이 있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