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앞에는 국경-인종 없어 국가 간 갈등과 불신, 도움 안 돼 방역물자 스와프-정보 핫라인 갖춘 韓中日협력체 필요… 지금이 적기다
조한승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흑해 연안에서 벌어진 크림전쟁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터키의 자존심 싸움이었다. 이 전쟁에서 전투로 죽은 병사들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크림전쟁은 치명적 질병 앞에서 자존심 경쟁만 벌인 지도자들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사례로 기록되었다. 정도는 덜하지만 지난 2개월여 동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한국, 중국, 일본이 서로에게 보여준 행태는 마치 군사안보의 전쟁 상황에서 적대국 간에 취하는 행동과 닮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동안에도 동북아 국가들 사이의 오랜 민족적 자존심 대결과 적대감은 멈추지 않았다. 출입국 제한, 항공편 차단, 입국 외국인 격리 등이 방역에 필요한 조치 그 자체로 해석되지 않고 차별과 외교적 보복으로 해석되는 일이 빈번했다.
하지만 싸워야 할 적은 이웃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치명적인 신종 바이러스이며, 바이러스에는 국가와 민족의 구분이 없다. 글로벌 상호의존 시대에 질병 확산을 막고 사태를 수습하는 데 해묵은 민족감정에 기댄 여론몰이가 그 방법이 될 수 없는 이유이다. 다른 나라가 방역을 잘못해서 우리가 아프다고 원망할 수는 있겠으나, 그 나라와 싸운다고 우리 몸속에 들어온 바이러스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웃나라들끼리 질병 정보를 공유하고 방역 공조를 이루어야만 적을 물리치고 사태를 하루빨리 극복할 수 있다. 바이러스가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변이를 일으키듯이 이에 맞서는 국가들도 국민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관계로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최근 동북아 보건협력의 필요성이 한중일 모두에서 언급되고 있으나 그 주도적 역할은 한국이 맡는 게 적합하다. 중국은 질병의 원인 제공 국가라는 이미지에 더하여 초기 질병 정보를 숨기고 왜곡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올림픽 개최를 위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했고 질병관리본부(CDC)가 없어서 비상시 감염병 대응 주체가 모호해지는 제도적 허점을 보였다. 반면 한국은 비록 초기 방역에 대한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질병 정보의 투명성, 개방성, 대중접근성이라는 원칙을 견지해 왔으며, 보건의료진의 헌신적 노력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바탕으로 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효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이 동북아 보건협력을 주도한다면 역내 갈등 요인을 우회하여 안정적인 동북아 교류협력 네트워크의 중심에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적으로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의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극복해야 할 산도 높다. 무엇보다 지도자들이 국가 간 자존심 경쟁보다 국민의 건강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고, 감염병과 같은 보건안보 이슈를 국내 정쟁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조한승 단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