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 / 동아일보 혁신과 도전의 100년] <1> 창간부터 이어지는 모험정신 DNA
동아일보의 역사는 혁신과 도전의 역사였다. 1921년 8월 29일자에 실린 백두산 천지 모습(사진 ①). 백두산에 특파된 취재팀이 촬영한 이 사진은 우리 손으로 찍은 첫 백두산 사진이다. 창간 당시 편집국과 기자들(사진 ②). 비행사 안창남이 서울에 도착한 소식을 전한 1922년 12월 지면(사진 ③). 동아일보가 주최하고 성금을 모금해 이뤄진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한국인 최초의 한반도 상공 비행으로 기록됐다. 동아일보DB
“용장한 프로펠러 소리를 내며 서서히 뜨기 시작하여… 공중으로 웅장하게 날아오르니 수만 군중의 환호하는 소리는 여의도 넓은 마당이 떠나가는 듯하고….”
1922년 12월 10일, ‘기다리던 날’. 동아일보가 다음 날 신문에 1개 면을 할애해 ‘반도의 천공에 최초의 환희, 혹한을 정복한 동포의 열성’이라고 보도한 ‘이날’은 한국인이 한반도 하늘을 처음으로 난 날이었다.
주인공은 안창남(1901∼1930·건국훈장애국장). 그는 기체에 한반도 모양을 그려 넣은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해 서울 시내를 한 바퀴 돈 뒤 묘기 비행을 3차례 선보였다. 혹한의 날씨에도 전국에서 임시열차 등을 타고 모여든 관중 약 5만 명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의 비행은 조선의 미래와 희망, 그 자체였다. 일제의 지배를 받으며 침울해 있던 조선 청년들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안창남의 도전은 동아일보의 도전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일본에서 민간항공대회에 입상한 안창남이 고국 방문 비행을 할 수 있도록 1922년 10월 ‘안창남 고국방문비행후원회’를 조직하고 사무소를 동아일보사 사옥에 마련했다. 비행에 앞서 사설로 “안창남 군의 1회 비행이…조선인도 노력하면 이와 같이 될 것이라 하는…교훈으로 오인(吾人)의 두뇌에 인각(印刻)할 것이 아닌가”라고 분위기를 띄웠다.
그 결과는 창간 직후 ‘우리 손으로 찍은 최초의 백두산 사진’으로 이어졌다. 반만년 동안 말과 글로만 전해지던 백두산 천지의 모습이 1921년 8월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한국인의 뇌리에 사진으로 박혔다. 본보 창간부터 합류한 사진반 야마하나 기자(1890∼1935)와 사회부 민태원 기자(1894∼1935)를 비롯한 특파원들이 촬영의 주역이었다.
본보는 8월 21일부터 18회에 걸쳐 등반 리포트를 연재하는 한편 ‘백두산 강연회’를 열고 환등(幻燈)으로 실경 사진을 공개했다. 3·1운동 민족대표들의 재판 과정을 찍은 화보도 본보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졌다.
일제강점기 언론 출판 문화면에서도 ‘최초’의 도전과 혁신을 이어갔다. 1929년에는 최초로 서체를 민간 공모했다. 구약성경 개역에도 참여했던 이원모(1875∼?)의 서체가 당선됐고, 본보는 4년간의 실험 끝에 1933년 4만여 종의 독자적인 명조체와 고딕체 활자를 개발했다. 이 서체를 본보는 6·25전쟁 전까지 썼는데, 국내 출판물뿐 아니라 북한과 일본, 미국에서도 1958년까지 폭넓게 사용됐다. 지방판 발행도 우리 신문 역사상 동아일보가 처음(1924년)이다. 이 같은 혁신과 도전은 3대 사시(社是) 가운데 “조선 민중으로 하여금 세계 문명에 공헌케 하며 조선 강산으로 하여금 문화의 낙원이 되게 함”인 문화주의에 따른 것이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