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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 베이의 궤짝[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133〉

입력 | 2020-03-25 03:00:00


우화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한 지혜가 들어 있다. 수피(이슬람 신비주의) 수도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전승되었던 우화들을 모아 펴낸 인도 출신의 작가 이드리스 샤, 그의 우화집에 나오는 부부의 이야기도 그렇다.

누리 베이는 생각이 깊고 존경받는 알바니아인이었다. 그의 아내는 그보다 훨씬 나이가 적었다. 어느 날 저녁, 하인이 그에게 오더니 마님이 어딘지 수상하다고 말했다. ‘주인님의 할머니 것이었던 큰 궤짝에 집착하는 게 너무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남자 한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궤짝인데 안을 못 들여다보게 한다고 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아내의 방으로 갔다. 아내는 궤짝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하인의 의심 때문에 그러는지, 아니면 자기를 못 믿어서 그러는지 물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자물쇠를 열어 안을 보여주라고 했다. 그러자 아내는 하인을 내보내면 열쇠를 줄 테니 직접 열어보라고 했다. 그가 하인을 내보내자 그녀는 열쇠를 건네고 물러났다. 그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네 명의 정원사를 밤중에 불러 멀리 떨어진 정원에 궤짝을 묻게 했다. 열어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후로 그는 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열쇠까지 넘겨받았으니 그가 궤짝을 여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궤짝을 여는 것은 하인의 말에 휘둘려 아내를 불신하는 행위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편이 자신을 의심한 것에 상처를 받은 아내는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호기심을 억누르고 아내의 비밀을 그녀만의 것으로 남겨두기로 했다.

몇백 년 전의 이슬람 신비주의 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며 삶의 지혜와 윤리를 깨치게 했다. 중요한 것은 궤짝 안에 무엇이 들어있느냐가 아니라 선입관 없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다. 궤짝은 침해해서는 안 되는 ‘자기만의 방’에 대한 은유인 셈이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