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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민족과 함께 울고 웃은 레이스… 이젠 ‘플래티넘’ 명품축제로

입력 | 2020-03-25 03:00:00

동아일보 혁신과 도전의 100년
〈2〉겨레의 얼 일깨운 동아마라톤




손기정이 처음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 제2회 경영(京永) 마라손 경주회 소식을 전한 1932년 3월 22일자 동아일보 지면. 동아일보DB

“동아마라톤은 한국 마라토너들이 혼(魂)을 걸고 뛰어야 하는 대회입니다.”

김재룡 한국전력 마라톤 감독의 말이다. 김 감독은 1992년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9분30초로 2연패를 달성하면서 국내 코스에서 최초로 2시간10분 벽을 깬 주인공이다. 한국 마라톤 사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높은 순위(4위·1993년)에 오른 이도 그다.

1991년 동아마라톤에서 황영조(4위)를 제치고 우승한 김 감독은 “마라톤 선수에게 동아마라톤은 봄과 동의어다. 3월에 열리는 동아마라톤이 있기에 모든 마라톤 선수가 겨울 훈련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늘 도전을 기다리는 동아마라톤이 없었다면 손기정 선생님이나 황영조, 이봉주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동아마라톤은 한국 마라토너가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디딤대였다.

동아마라톤은 1931년 ‘제1회 경영(京永) 마라손 경주회’라는 이름으로 막을 올렸다. 현재 세계육상연맹(WA)에 등록된 전 세계의 마라톤 대회는 400개가 넘는데 이 가운데 1931년 시작한 동아마라톤보다 역사가 오래된 건 보스턴 마라톤(1897년 출범)뿐이다.

지난해 3월 18일 열린 2019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90회 동아마라톤 출발 모습. 동아일보DB

1회 대회는 서울 광화문∼영등포를 왕복하는 23.2km 코스였다. 이 대회 우승자였던 김은배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권태하(마라톤), 황을수(복싱)와 함께 한국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남자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1932년 열린 제2회 대회 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고, 제3회 대회 우승으로 국내 최강자로 우뚝 섰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처음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뛴 것도 1991년 동아마라톤이었다.

황영조(왼쪽)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936년 같은 종목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에게 축하를 받는 모습. 한국 마라톤을 대표하는 두 선수 모두 동아마라톤 출신이다. 동아일보DB

한동안 황영조에게 가려 있던 이봉주는 동아마라톤이 국제대회로 승격한 지 2년째였던 1995년 대회에서 2시간10분58초로 우승하면서 한국 마라톤의 간판으로 떠올랐다. 1996년 대회를 통해 개인 최초로 2시간8분대(2시간8분26초)에 진입한 이봉주는 이를 발판으로 그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봉주는 37세이던 2007년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8분4초를 끊는 투혼을 발휘한 끝에 이 대회 최고령 우승자라는 기록까지 세웠다.

이봉주가 이 대회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95년에 달린 길은 서울이 아닌 천년 고도(古都) 경주였다. 동아마라톤은 대한육상경기연맹과 함께 국제 대회가 가능한 새로운 국내 코스를 발굴하기로 하고 1993년부터 7년 동안 경주에서 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2000년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을 대표하는 마라톤 대회답게 서울 도심을 뛰는 게 상징성이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동아마라톤은 2010년 국내 마라톤 대회로는 처음으로 세계육상경기연맹(IAAF·현 WA) 골드 라벨 인증을 받았다. 10년 연속 국내 유일의 골드 라벨 대회였던 서울국제마라톤 겸 동아마라톤은 지난해 WA가 새롭게 만든 플래티넘 라벨로 격상됐다. 남녀가 모두 참가하는 풀코스 마라톤 대회 가운데 플래티넘 라벨은 전 세계에 7개뿐이다. 늘 코스 개발과 대회 수준 향상을 위해 혁신적으로 노력한 결과라는 평가가 나온다.

▼조선체육회 탄생 이끌어… ‘100년 전국체전’ 뿌리가 되다▼
 
1920년 통합 체육 기관 없어 올림픽 출전 못하자 ‘창립’ 불지펴… 전조선 야구대회가 첫 행사
 
“각성하라. 운동에 대해 크게 각성하라. 열(熱)과 역(力)을 내어 운동에 대하여 큰 열과 역을 쓰라. … 오인(吾人)은 이에 장래의 운동계를 위하여 기관을 설립함이 자금(自今)의 급무(急務)요, 요무(要務)며 이론보다 실제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겠다.”

동아일보는 창간 후 열흘이 지난 1920년 4월 10일부터 사흘에 걸쳐 ‘체육 기관의 필요를 논함’이라는 칼럼을 내보냈다. 평파(平波)라는 필명으로 이 칼럼을 쓴 변봉현 기자는 일본 와세다대 재학 시절 야구부에서 활동했던 운동선수 출신이었다. 그는 이 시리즈를 통해 그해 8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7회 여름 올림픽에 조선 선수를 내보내지 못하는 건 통합 체육 기관이 없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이후 전국 각지에 있던 동아일보 지국을 거점으로 체육 기관 결성 움직임이 일었고 그해 6월 16일 서울 인사동 명월관에서 전국 유지 50여 명이 모여 조선체육회 창립준비위원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변 기자뿐 아니라 인촌 김성수 선생, 장덕수 주간, 이상협 편집국장 등 당시 동아일보 관계자도 참석했다. 변 기자는 이 자리에서 창립준비위원을 맡았다.

이런 노력은 결국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 창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조선체육회는 ‘창립 취지서’를 통해 “조선 인민의 생명을 원숙(圓熟) 창달(暢達)하는 사회적 통일적 기관”을 목표로 삼는다고 밝혔다. 광복 이후 조선체육회는 대한체육회로 이름을 바꿔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애국지사 이상재 선생(오른쪽)이 시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대한체육회 90년사 1권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 대한체육회는 2010년 펴낸 ‘대한체육회 90년사’를 통해 “조선체육회의 창립에는 동아일보의 적극적인 후원이 큰 힘이 됐다”며 “동아일보사 간부들은 조선체육회가 우리 민족의 몸과 마음을 강건하게 만드는 데 크게 도움이 되는 조직임을 깊이 이해하고 발기 총회에도 힘을 보태게 된다”고 소개했다.

대한체육회는 해마다 창립기념일에 “보라, 반공(半空·그리 높지 않은 공중)에 솟은 푸른 솔과 대지에 일어선 높은 산을!”로 시작하는 창립 취지서를 낭독한다. 이 글을 쓴 주인공이 바로 당시 동아일보 장 주간이었다. 장 주간은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를 맡았고 조선체육회 초대 회장을 지낸 장두현 선생은 이듬해부터 1924년까지 3년 동안 동아일보 임원을 지내기도 했다.

조선체육회는 창설 후 첫 사업으로 1920년 11월 4일부터 사흘 동안 배재학교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동아일보는 이 대회 후원을 맡았다. 지난해 서울에서 100번째 대회를 치른 전국체육대회(전국체전)가 바로 이 대회에 뿌리를 두고 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