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정체성의 상징 ‘비례대표 1번’의 명암
○ ‘비례 1번’에 담긴 당의 총선 메시지·정체성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 이후 처음 치르는 이번 총선에서는 전례 없는 비례 전용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어느 때보다 비례대표 후보들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다. 이름이 낯선 신생 정당일수록 각 당의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고 홍보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비례 1번 후보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미래통합당의 비례대표용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은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인 윤주경 전 독립기념관장을 비례대표 1번으로 내세웠다. 윤 전 관장을 통해 보수정당을 겨냥한 여권의 ‘친일 프레임’을 방어하겠다는 전략이다. 미래한국당 원유철 대표는 윤 전 관장을 1번으로 내세운 이유에 대해 “자유, 정의, 평화라는 독립운동 정신을 통해 국민과 함께 호흡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생당도 외부 영입인사인 정혜선 가톨릭대 보건대학원 교수를 비례 1번에 공천했다. 정 교수는 당 코로나19대책특별위원장으로, 민생당 역시 코로나19 극복 메시지를 담은 결정이다. 국민의당도 ‘코로나19 극복’에 방점을 찍고 비례 1번에 안철수 대표가 코로나19 진단 의료봉사를 했던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의 최연숙 간호부원장을 공천했다. 최 부원장을 내세워 민생과 중도실용이라는 당의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전략이다.
정의당은 비례대표 1번에 청년과 세대교체 메시지를 담았다. 만 35세 이하 청년을 비례대표 1번에 우선 배정하기로 한 정의당은 류호정 민노총 화섬식품노조 선전홍보부장을 공천했다. 류 후보뿐 아니라 정의당이 발표한 비례대표 명단 29명의 평균 연령은 43.5세로 젊은 편이다.
친문(친문재인)·친조국(전 법무부 장관) 정당을 표방하는 열린민주당은 여권 강성 지지층 결집이 최대 목표다.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반대하며 ‘4대강 저격수’로 통했던 김진애 전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의원을 1번에 배치했다.
비례대표 1번에 여성을 추천하도록 공직선거법이 바뀐 것은 17대 총선부터다. 여성 정치인 양성의 제도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각 당이 비례대표 공천 홀수 번호에 무조건 여성을 추천하도록 한 것.
법이 바뀌면서 권력의 상징이었던 비례 1번이 17대 총선부터는 정책 등 당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는 소아마비 장애인인 장향숙 장애인연합공동대표(17대), 경제전문가 이성남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 위원(18대), 전태일 열사 여동생 전순옥 소상공인연구원 이사장(19대)을 각 총선 비례 1번으로 내세웠다.
통합당 계열 정당에서는 17대 총선에서 경제 분야 정책 메시지를 드러내기 위해 김애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 교수를 비례대표 1번에 공천했다. 18대 총선에서는 복지 강화를 위해 ‘빈민촌 대모’로 불리는 강명순 부스러기사랑나눔회 상임이사를, 19대 총선에서는 이공계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기 위해 민병주 한국원자력연구위원을 공천했다.
○ 후보 급조로 재선 어려워…女 정치인 등용문 ‘한계’
비례대표 1번은 각 당에서 미는 총선의 얼굴로서 역할을 하지만 정작 재선 도전 성적은 초라하다. 17∼19대 각 당의 비례대표 1번이었던 장향숙 이성남 전순옥 전 의원(민주당 계열), 김애실 강명순 민병주 전 의원(통합당 계열) 중에 재선에 성공한 경우는 한 명도 없다. 이들 중 일부는 지역구로 재선에 도전했지만 실패했거나, 차기 총선 출마를 아예 접은 경우들이다. 비례 1번 출신(민주노동당)으로 재선에 성공한 경우는 정의당 심상정 의원(3선)이 유일하다. 20대 국회에서는 통합당 송희경 의원과 국민의당 비례 1번 출신인 신용현 의원이 이번 총선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 민주당 박경미 의원은 서울 서초을에, 정의당 비례대표 1번 출신인 이정미 의원은 인천 연수을에 도전한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국회에 입성한 비례 1번 출신 의원들의 재선 성적표는 왜 초라할까.
전문가들은 애초부터 시류에 편승해 일회성 이벤트처럼 여성 인재 영입이 이뤄지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비례대표제 취지대로 정책 전문성과 참신함이 동시에 검토되기보단 총선이 임박한 시점의 사회적 이슈와 맞는 케이스를 선택적으로 찾다보니 여성 정치인 등용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박명호 동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수년 전부터 정치 입문을 위해 차곡차곡 준비한 게 아니라 급조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롱런이 힘든 것”이라며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이번에 여러 당에서 비례대표 1번에 의료계 출신을 공천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실제로 더불어시민당은 신 교수를 공천할 당시 공천관리위원회에서 후보 신청 접수부터 확정까지 만 24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후보를 급조한 ‘번갯불 공천’이란 비판을 받았다. 정의당도 청년 콘셉트에 집착하다 류 후보에 대한 검증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류 후보는 2014년 이화여대 재학 시절 온라인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 계정을 지인과 공유해 ‘대리 게임’을 했다는 의혹으로 도덕성 논란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총선에서는 비례 2번에 공천된 노정치인에 대한 비판을 가리기 위한 용도로 여성 신인들이 이용됐다는 비판까지 나온다. 우리공화당은 ‘친박 맏형’으로 통하는 8선의 서청원 의원이, 친박신당은 4선 홍문종 의원이 비례 2번을 받았다. 민생당은 3선 의원이자 경기도지사를 지낸 바른미래당 손학규 전 대표에게 2번을 줬다가 당 안팎 비난이 거세게 일자 14번으로 바꿨다. 박 교수는 “일부 당의 비례 2번을 보면 비례대표제를 전형적으로 악용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며 “결국 국민이 심판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비례대표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고야 best@donga.com·강성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