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극복 팔 걷고 나선 세계의 억만장자들
미국 CNN은 최근 “돈, 전문지식, 자원을 모두 투입해 코로나19 전장에서 맹활약하는 억만장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구체적인 해법으로 상황을 진정시키고 있다”고 전했다. 작은 국가처럼 움직이는 각국의 ‘착한 큰손’인 셈이다.》
○ 마윈, 효율적인 핀셋 기부
“자선활동 역시 효율이 중요하다. 3달러만 쓸 수 있다면 왜 5달러를 쓰겠는가? 2시간에 끝낼 수 있다면 왜 4시간을 끌겠는가?”(2016년 중국 항저우 자선활동 콘퍼런스)
중국 2대 부자 마윈(馬雲) 알리바바 창업주(자산 약 46조 원·세계 21위)는 일사불란하고 광범위한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적재적소에 필요한 물품을 제공하는 ‘핀셋 기부’가 그의 장기. 회사를 경영하는 방식이 자선활동에 그대로 묻어난다는 평가다.
중국의 상황이 잠잠해지자 마 전 회장은 기부 범위를 전 세계로 넓혔다. 이웃 국가인 한국, 일본에 마스크 100만 장씩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미국, 아프가니스탄, 이란을 포함해 전 세계 약 110개국(유럽 17개국, 아프리카 54개국, 아시아 13개국, 중남미 24개국)에 마스크 1730만 장, 진단키트 240만 개와 의료장비(방호복, 산소호흡기, 체온계)를 실어 날랐다.
마 전 회장은 트위터에서 기부 소식을 나눈다. 지난달 16일 트위터를 시작한 그의 첫 게시물은 미국에 마스크 100만 장, 진단키트 50만 개를 보내는 사진이었다. 유럽 아프리카 중남미 등을 누비는 모습이 시시각각 공개되면서 그는 중국의 ‘민간 외교 사절’로 떠올랐다.
지난해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마 전 회장은 2014년 잭마 재단(JMF) 자선활동으로 인생 2막을 열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그는 “빌 게이츠만큼 부자가 될 순 없지만 그보다 더 일찍 은퇴할 수 있다”고 했다. 세계 1위 부자에서 1위 자선가로 변신한 게이츠를 롤모델로 꼽아온 마윈의 모토는 이렇다.
“돈을 기부한다고 바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면 세상도 바뀔 수 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모두 구제할 수 없고 아픈 자들을 모두 치료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모두의 마음속 친절을 일깨워줄 수는 있다.”
재단은 지원 규모로 1000만 달러를 잡았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액수를 10배로 늘렸다. 기부액 중 절반 이상인 6000만 달러는 WHO, 감염병예방혁신연합(CEPI) 및 바이오기술 기업의 백신 개발 지원에 쓰인다.
게이츠는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 최고경영자(CEO)직에서 물러난 뒤로 자선활동에 앞장서 왔다. 미국에서 코로나19 확산세가 가팔라지는 가운데 지난달 13일에는 마이크로소프트, 버크셔 해서웨이 이사 자리에서 모두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날 그는 비즈니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인 링크트인(마이크로소프트의 자회사)에서 “자선활동에 더 전념하기 위해 현재 맡고 있는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모든 경제 활동을 접고 재단 활동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이후 그의 행보는 더 과감해졌다. 지난달 24일 온라인 테드(TED) 강연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외식을 하라고 부추기는 건 무책임한 일이다. 경제가 중요하다는 일부 정치인의 발언은 말이 안 되는 행위”라고 날을 세웠다. 지난달 31일 워싱턴포스트(WP) 기고에서는 “모든 걸 봉쇄해야 한다는 사실을 국가 지도자들이 분명히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게이츠는 수년간 팬데믹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2월 더 뉴잉글랜드의학저널 기고에서 그는 “(코로나19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바이러스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2018년 말라리아 서밋 연설에서는 “세계에서 발전이 없는 한 가지 분야는 바로 세계적 전염병에 대한 대응”이라며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처럼 신종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다. 팬데믹에 대해 전쟁을 준비하는 것처럼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게이츠는 2017년에도 팬데믹을 기후변화, 핵전쟁과 함께 ‘인류의 3대 위협’으로 꼽았다.
코로나19 이전에도 팬데믹의 중심에는 게이츠 재단이 있었다. 재단은 2014년 에볼라 사태 때에도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5000만 달러(약 615억 원)를 기부했다. 또 재단 출범 이래 말라리아 퇴치 기금으로만 약 20억 달러(약 2조4590억 원)를 투입했다.
이번에도 세계 주요 억만장자들이 게이츠 재단을 통해 코로나19 치료제 연구개발비를 기부하고 있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는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2500만 달러(약 307억 원)를 게이츠 재단을 통해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마이클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은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 긴급 대응팀 지원을 위한 ‘글로벌 대응 이니셔티브’ 자금 4000만 달러(약 492억 원)를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미 전자상거래 업체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 창업주는 ‘코로나19 특수’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실직자 10만 명을 고용했다. 그는 또 이동 제한과 자가 격리 조치로 사재기 광풍이 불자 원활한 생활필수품 공급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베이조스는 최근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물류, 운송, 공급망을 조정해 소독제, 의료용품 같은 필수 품목의 재고 관리와 배송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겠다. 또 노인 등 취약계층에는 더 적극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최근 ‘호주 산불’을 계기로 기후변화 대응 재단에 약 11조 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베이조스는 또 코로나19 대응과 관련해 백악관, WHO와 정보 교류 및 기술 지원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고 BBC는 전했다.
미국 중국뿐 아니라 각국의 대표 억만장자들도 기부 레이스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은 3대 억만장자가 나란히 10억 랜드(약 660억 원)씩을 기부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남아공 갑부 1, 2위인 니키 오펜하이머 전 드비어스 회장(자산 약 9조2200억 원)과 요한 루퍼트 리치몬트·렘그로 회장(자산 약 6조7600억 원)이 3월 중순 가족들과 운영하는 재단을 통해 코로나19 대응을 위해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약 일주일 뒤인 3월 28일 남아공 3대 갑부 파트리스 모체페 아프리칸 레인보 미네랄 회장(자산 약 2조9500억 원)도 10억 랜드 상당의 주식 보유분을 내놓으며 기부에 동참했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개인 기부로는 마윈, 게이츠, 저커버그에 이어 가장 높은 액수다.
멕시코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 아메리카 모빌 CEO 역시 지난달 25일 자신의 재단을 통해 의료장비 및 공중보건 교육 지원을 위해 10억 페소(약 503억 원)를 기부한다고 밝혔다. 기부금은 국립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사용할 산소호흡기, 초음파검사기 등 장비 및 마스크, 장갑 등 의료진을 위한 보호기구 구매와 멕시코 교육부의 온라인 교육 플랫폼인 프루에바T를 통한 어린이 대상 코로나19 확산 방지 교육 지원에 쓰인다.
누텔라, 페레로로쉐, 킨더초콜릿으로 잘 알려진 페레로의 조반니 페레로 회장은 이탈리아 국가비상위원회에 1000만 유로(약 133억 원)를 기부했다. 그는 이탈리아 1위 부호다. 사업가 출신으로 총리를 3차례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유럽의회 의원도 상황이 심각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의 신규 병원 건립 비용으로 1000만 유로를 내놨다.
○ ‘패닉과 방치의 악순환’ 끊어야
억만장자들의 선행은 문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근본적인 전염병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려면 반짝 기부가 아닌 연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피터 샌즈 ‘에이즈 결핵 말라리아 퇴치 세계기금(GFATM)’ 상임이사는 2017년 세계은행 보고서에서 “팬데믹이 출연할 때마다 거액의 기부금이 모인다. 하지만 확산세가 멈추면 이런 자금은 다른 쪽으로 이동해 예방 시스템은 구축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이런 패턴을 ‘패닉과 방치의 순환’이라고 불렀다.
개빈 야메이 듀크대 교수는 최근 보고서에서 “전염병이 통제되기 시작하면 정치인과 각종 재단의 관심이 줄어들고, 그로 인해 해당 전염병이 다시 창궐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역설이 반복된다”고 꼬집었다. 야메이 교수는 예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연간 95억 달러 이상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그는 “미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팬데믹의 위험 비용은 약 5000억 달러”라며 “국제 과세와 국제 공공보건 재원을 조성해 예방 시스템을 마련하면 이런 위험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보미 기자 b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