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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예술 가치 드높인 젊은 감각… 나도향, 낭만적 허무주의로 신선한 파장

입력 | 2020-04-07 03:00:00

[창간 100주년 기획/동아일보 100년 문화주의 100년]
<2> 염상섭과 나도향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문단의 대표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하는 장이었다. 왼쪽부터 염상섭의 연재소설 ‘해바라기’ 첫 회가 실린 1923년 7월 18일자 동아일보, 염상섭. 동아일보DB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동아일보 창간 작업에는 당대의 문사들이 여럿 참여했지만 염상섭(1897∼1963)이 신임 기자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신문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다. 대학을 중퇴하고 떠돌이 노동자를 자처했던 그를 동아일보는 왜 창간 때 끌어들였을까?

염상섭은 일본 게이오(慶應)대에 입학했지만 대학 생활을 1년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다. 병을 핑계로 학교를 중퇴한 그는 귀국하지 않고 오사카(大阪) 지방을 떠돌았다. 그 무렵 도쿄에서 재일조선인유학생회 주도로 유명한 2·8독립선언이 일어났고 곧바로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이 터졌다. 염상섭은 이 놀라운 사건들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바로 오사카 덴노지(天王寺) 공원에서의 만세 사건이다.

염상섭은 오사카 지역의 몇몇 유학생과 회동하면서 ‘재대판(在大阪) 조선 노동자 일동 대표’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독립선언문을 작성했다. 그는 이 선언문에서 강제 병합 후 10년 동안 일본이 보여준 강압적인 식민지 지배정책을 비판하면서 자유의 존엄성을 내세워 조선 독립을 주창했다. 하지만 거사 전날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동조했던 유학생들도 모두 검거됐다. 몇 달 뒤 감옥에서 풀려나온 염상섭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무산자 해방운동으로 우회할 것을 결심했다. 스스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요코하마에 있는 복음인쇄소 직공이 됐다. 그가 선택한 노동자 생활은 자기의식의 추상성을 벗어나 구체적 현실감각을 체득하기 위한 일종의 학습 과정이었다.

왼쪽부터 나도향의 연재소설 ‘환희’ 첫 회가 실린 동아일보 1922년 11월 21일자, 나도향. 동아일보DB

염상섭을 동아일보에 천거한 사람은 창간 당시 정경부장이던 진학문이다. 진학문은 오사카 만세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주동자였던 염상섭의 존재를 눈여겨보면서 그의 남다른 행보를 주목했다. 그리고 염상섭을 일본 도쿄 주재 기자로 동아일보에 추천한다. 요코하마의 작은 인쇄소 직공으로 일하고 있던 염상섭은 동아일보와 만남으로써 격동의 삶과 지지부진했던 유학 생활을 모두 정리할 수 있게 된다.

염상섭에게 신문기자란 무엇을 말하는가? 염상섭은 신문기자 생활을 ‘민족운동에의 깊은 봉사’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는 기자라는 직업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에 만족했고, 몇 차례 기명 논설을 지면에 쓰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처음 발표한 것이 ‘자기 학대에서 자기 해방으로’라는 논설이다. 이 글에서 염상섭이 강조하는 것은 자기기만, 자기 포기, 자기 학대로부터 자기 해방으로 이어지는 지점이다. 염상섭은 이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일체의 외적 해방의 발족점’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자신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는 대외적 해방을 요구할 자각도 없고 권리도 없다. 염상섭은 중학 시절부터 이어진 10년이 넘는 일본 유학 생활을 돌아보면서 그것이 결국은 자기 학대의 세월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가 됨으로써 스스로 자기 해방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염상섭의 기자 활동 가운데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동아일보의 지면에 소개한 것은 특종감에 해당한다. 야나기는 일본의 대표적인 미술평론가였다. 그는 3·1만세운동에 대한 일본 경찰의 혹독한 탄압을 보고 분개하면서 ‘조선인을 상(想)함’이라는 논설을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발표한 바 있다.

이 글의 서두에서 야나기는 일본이 많은 돈과 군대와 정치가를 조선에 보냈지만 언제 진심의 사랑을 준 적이 있는지 묻고 있다. 이런 식의 질문이야말로 식민지 지배의 현실을 보는 지배자의 동정적 시각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야나기는 정치 군사 경제 등의 문제를 넘어서서 조선의 예술을 그 논의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조선 고예술 건축과 미술품이 거의 퇴폐하고 파괴된 것은 그 대부분이 실로 왜구의 소행이었다. 중국은 조선에 종교와 예술을 전해주었으나 그것을 거의 파괴한 자는 일본의 무사들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인의 골수에 사무친 원한일 것이다. 하지만 미래에 승리할 것은 저들의 미(美)요 우리의 칼날은 아니다.”

야나기의 글을 통해 염상섭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은 조선의 예술이었다. 식민지 상황에서 한국인의 자존감을 살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문화와 예술뿐이었기 때문이다. 신문기자 염상섭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문화주의를 천명하고 있는 동아일보가 놓쳐서는 안 될 소중한 가치이기도 했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기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이 특이한 접근 방식은 염상섭의 젊은 감각으로 가능했던 일이다.

염상섭의 첫 기자 생활은 반년 정도 만에 끝났다. 그는 변영로, 오상순 등과 함께 피폐한 땅 위에 새롭게 꽃피울 문학을 구상했다. 이들이 만든 문학 동인지 ‘폐허’(1920년 7월 창간)가 세상에 나올 무렵, 염상섭은 모두가 부러워하던 동아일보의 무대를 스스로 떠났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는 마땅한 답이 없다. 현실의 밑바닥을 뒤지는 기자에 안주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을 그리고 싶어 했던 것일까.

염상섭이 동아일보에 다시 나타난 것은 1923년이다. 그는 스스로 별을 그리는 작가가 되어 소설 ‘해바라기’(1923년)를 들고 동아일보의 독자들과 재회했다. 그가 도쿄 시절 한때 마음을 두었던 신여성 나혜석이 이 소설 속의 주인공으로 위장돼 등장한다. 무미건조한 매력의 소설가 염상섭의 내면 풍경을 헤아려 볼 수 있는 작은 흥밋거리다.

작가 나도향(1902∼1926)이 장편소설 ‘환희’(1922년)를 동아일보에 연재한 것은 문단의 사건이었다. 나도향은 동인지 ‘백조’(1922년)를 통해 얼굴을 내민 문단의 신예였지만 의사가 되라는 가족의 요구를 저버린 채 문단을 떠돌던 반항아였다. 동아일보는 일본소설 번안작인 민태원의 ‘부평초(浮萍草)’를 연재했는데 통속소설로 대중에게 아첨한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해 있었다. 하지만 신문에 연재소설을 써낼 수 있는 필력을 지닌 작가를 찾기가 쉽지 않던 차에 나도향의 등장에 모두가 환호했다.

장편소설 ‘환희’는 이광수의 ‘무정’(1917년)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이어서 문단의 관심이 모였다. 이 소설은 청년 은행원 이영철과 여학교에 다니는 혜숙이라는 남매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남매가 각각 추구하는 낭만적 사랑과 참된 행복이라는 주제는 이들의 열정을 그대로 용납하지 않는 현실적 제약 속에서 서로 어긋난다.

소설 속 여주인공 혜숙은 부호의 아들 백우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물질적 허영과 욕망에 빠져든다. 자기 사랑에 대한 배반은 신파소설 ‘장한몽’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당대의 독자들은 이 장면에 열광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 생활에 고통스러워하던 혜숙은 그대로 ‘장한몽’의 여주인공 심순애의 방황을 따라간다. 하지만 대동강변을 떠돌며 고통스러워하던 심순애와 달리, 혜숙은 낙화암이 있는 부여 백마강에 몸을 던진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지켜보았던 또 한 줄기의 이야기가 영철과 기생 설화의 연애다. 나도향 자신도 이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를 소설 속에서 거듭 확인하고자 한다. 이광수의 ‘무정’에서 이형식이 기생 박영채와 결합할 수 없었던 지점을 독자들이 기억해 내는 순간 이 소설의 이야기는 새로운 문제를 일으킨다. 기생 영채가 신교육이라는 구원의 지팡이를 잡고 화류계를 벗어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이광수 식의 계몽적 서사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기생 설화는 신여성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녀는 끝내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을 지켜내지 못한 채 스스로 목을 맨다. ‘환희’에서 그려내고자 했던 사랑의 고뇌와 갈등은 결국 두 여성 주인공의 극단적 선택으로 마감된다.

‘환희’의 연재가 끝나자 나도향은 장안의 명사가 됐다. 그러나 그의 엄격한 조부는 끝내 손자의 일탈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도향은 일본으로 건너가 자기 문학의 새로운 출구를 찾았지만 빈곤을 견디지 못했다. 병이 깊어져 귀국한 그가 가족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이 스물네 살 때다. 소설가 박종화는 ‘아, 박행한 천재여’라며 그의 요절을 애통해했다. 나도향의 죽음은 초창기 문단이 처음으로 쓰는 가슴 아픈 애사(哀詞)로 기록돼 있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