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 주지사(1932∼2015·오른쪽)와 2011년부터 주지사로 재직 중인 그의 장남 앤드루 쿠오모는 최초의 부자(父子) 뉴욕 주지사로 법률가 출신, 3선 경험 등의 공통점을 지녔다. 대권 도전을 망설였던 부친과 달리 쿠오모 주지사는 차기 민주당 대선후보군으로 발돋움했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1991년 12월 20일 뉴욕주 주도(州都) 올버니 공항. 한 해 전 3선(選)에 성공한 쿠오모 주지사를 이웃 뉴햄프셔주로 데려갈 비행기가 활주로에 등장했다. 다음해 2월 민주당의 뉴햄프셔 대선 예비경선에 나서려면 이날 오후 5시까지 등록해야 했다. 지도부는 그의 등판을 원했다. 그는 1984년 전당대회에서 명연설로 이름을 날렸고 1988년에도 출마를 권유받았다. 또 뉴욕 주지사는 45명의 미 대통령 중 4명을 배출했을 정도로 부통령, 국무장관 못지않은 위상을 자랑한다. 49세 젊은 나이도 강점이었다.
쿠오모는 마감 90분을 앞두고 등록을 포기했다. 여행을 싫어하는 그는 1년 내내 미 전역을 떠돌며 허름한 숙소에서 쪽잠을 자고 지역 유지에게 아부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다. 그가 ‘뉴욕 소황제’에 안주할 때 무명의 아칸소 주지사 빌 클린턴이 뉴햄프셔 경선에서 깜짝 1위를 차지했다. 기세를 몰아 백악관 주인이 된 클린턴은 1993년 종신인 연방대법관직을 제의했다. 쿠오모는 워싱턴행을 망설이며 또 거절했다. 그 대타가 ‘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으로 불리는 루스 긴즈버그 대법관이다.
마리오 쿠오모가 대권 도전을 포기한 지 29년이 흐른 지금 그의 장남이자 역시 3선 뉴욕 주지사인 앤드루(63)가 민주당의 구원투수로 부상했다. 11월 대선에 나설 후보는 조 바이든 전 부통령으로 사실상 굳어졌지만 코로나19 국면에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앤드루는 전쟁터 같은 뉴욕의 상황을 가감 없이 알리고 ‘불평하고 싶으면 나를 탓하라’는 책임감 있는 태도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의 매일 아침 기자회견을 2차 세계대전 당시 라디오 연설로 승전 의지를 북돋운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의 노변담화(爐邊談話)에 비유한다. 루스벨트 역시 뉴욕 주지사를 발판으로 전무후무한 4선 대통령에 올랐다.
평범한 가문의 여성과 결혼해 평생 해로한 부친과 달리 아들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 겸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의 딸인 인권운동가 케리와 15년간 부부로 지냈다. 케네디 전 장관은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이 사실상 확정됐던 1968년 6월 친이스라엘 행보에 불만을 품은 팔레스타인계 남성에게 암살됐다. 부친, 전 장인과 전 처삼촌이 대통령이거나 대권을 노렸던 만큼 앤드루의 백악관 도전 역시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일 수 있다.
CNN 앵커인 그의 동생 크리스는 지난달 말 형을 인터뷰하며 대권 도전 여부를 집요하게 물었다. ‘출마 계획이 있냐’ ‘지금 없으면 훗날 고려할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아홉 번 ‘노(No)’를 외쳤다. 프라임타임에 전국으로 생중계된 이 장면을 보면서 그가 정말 대권에 도전하지 않을 것으로 여긴 순진한 유권자가 있을까. ‘쿠오모’ ‘대통령’이란 단어만 각인됐다.
무엇보다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아 대규모 조직 관리와 예산 집행, 복잡다단한 이해관계 조율, 대국민 소통을 해본 경험은 백악관 주인이 되기 위한 최고의 선행학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친이 코로나란 동네의 분쟁을 해결하며 사실상 정계에 입문했고 아들은 코로나19 위기에서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는 점도 묘하다. 대권 도전이 가능한 상황이 왔을 때 아들이 좌고우면하던 부친과 달리 과감하게 행동할지도 관심이다.
그가 난세 영웅이 될지, 반짝 스타로 끝날지 아직 알 수 없다. 분명한 점은 코로나19 위기가 세계 지도자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고 진정한 지도자는 위기 때 자신의 역량을 입증한다는 사실이다. 아들 주지사의 진짜 인생 역정은 이제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