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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선임병 사진으로 수능 치렀지만 안 걸렸다”… 뻥뚫린 신분확인

입력 | 2020-04-09 03:00:00

부대 후임, 선임 수능 대리응시




‘2020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대리시험 부정행위를 신고합니다.’

올 2월 11일 국민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에는 이 같은 제목의 공익제보가 접수됐다고 한다. 제보자는 “수능은 대한민국에서 입시를 결정하는 가장 큰 시험으로서 공정함이 최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교육당국의 철저한 진상조사와 신속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이어 “(대리시험은) 몇 년간 최선을 다하여 수능을 준비한 인원들에 대한 모욕이자 대한민국의 수능을 기만하는 행위”라고도 했다.

○ “생김새 다른데 신분 확인 절차 통과”

국민신문고에 접수된 대리시험 제보 내용은 구체적이었다. 군 복무 중인 대학생 A 씨(20)가 같은 부대 선임 B 씨(23)의 부탁을 받고 응시했다는 제보 내용엔 대리시험을 부탁하고 치른 A, B 씨의 군부대와 실명이 적혀 있었다. 또 A 씨가 수능을 치른 서울시내 사립고등학교 고사장과 수능 당일 A, B 씨가 휴가를 같이 갔고 이후 대리시험으로 확보한 수능 성적을 갖고 B 씨가 지원한 서울지역의 3개 대학과 학과명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권익위로부터 관련 자료를 넘겨받은 서울시교육청은 40여 일 동안 1차 조사를 한 뒤 제보의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해 3일 군 경찰에 A 씨 등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다.

군 경찰이 교육청으로부터 입수한 자료에는 “선임의 신분증과 선임 사진이 붙은 수험표로 시험을 치렀지만 (감독관의 본인 확인 절차에) 안 걸렸다”는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A, B 씨와 친분이 있는 인사는 “둘의 생김새가 다른데 어떻게 신분 확인 절차를 무사히 넘겼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2004년 수능 대리시험이 적발된 이후 교육당국은 대리시험을 수능 부정행위의 주요 유형으로 분류해 관리 감독을 대폭 강화했다. 수능을 주관하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제공한 감독관 유의사항에 따르면 감독관은 매 교시 응시원서와 수험표, 신분증을 대조해 본인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1교시 국어영역과 3교시 영어영역 때는 시험 시작 전에 별도로 시간을 두고 필적확인란 등을 통해 본인 여부를 검증한다. 대리시험을 방지하기 위해 수능 당일 교실마다 감독관 2명(4교시는 3명)이 배치돼 이 업무를 수행한다. 감독관은 매시간 교체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초기 조사를 담당한 한 관계자는 “(A 씨가 입실한) 해당 고사장 감독관들을 상대로 시험 감독 과정에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 조사했다”고 말했다.

○ “대학 3곳에 지원, 면접 부탁했다가 거절”


군 경찰이 확보한 자료에는 B 씨가 A 씨의 대리시험을 통해 획득한 수능 점수로 정시전형을 통해 대학 3곳에 지원했다는 내용도 있다. B 씨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더 높은 수능 성적으로 학교를 옮기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B 씨는 1곳의 면접까지 대신 봐달라고 A 씨에게 부탁했지만 거절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B 씨는 스스로 해당 대학의 2차 전형인 면접에 응했다가 불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B 씨는 또 다른 대학에는 합격권에 들었지만 최종 입학 등록을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군 내부에선 심적인 부담을 갖고 있던 A 씨가 올 2월부터 일부 부대원에게 대리시험을 친 사실을 털어놓았고, 소문이 군 내부에서 퍼지면서 B 씨가 부담을 느꼈을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고 한다.

A 씨는 군 경찰의 조사에서 “선임이 ‘집이 어렵고, 빚이 있는 데다 이번에 수능을 망치면 안 된다’고 사정해 부탁을 들어줬다”며 대리시험을 치른 사실 자체는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금품 등은 전혀 받지 않았다고 했다. 군 경찰은 A 씨가 수능 시험장에서 적발될 위험 부담을 안고도 대리시험을 치른 배경 등이 석연치 않다고 보고 A 씨를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불구속 입건해 범행 이유 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

군 경찰은 지난달 전역한 B 씨의 조사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 민간인 신분이라도 군 복무 중에 저지른 범행에 대해 군 경찰의 참고인 조사는 가능하다. 다만 군 경찰은 강제수사를 할 수 없다. A 씨의 수사를 의뢰한 서울시교육청은 아직까지 민간인이 된 B 씨를 경찰이나 검찰 등에 따로 수사 의뢰하거나 고발 조치하지는 않았다. 군 법무관 출신의 한 판사는 “중대한 사건의 경우 전역한 민간인은 민간 수사기관에서 별도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성희 기자 che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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