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충격 속 “디지털 성범죄 ‘위장수사’ 허용” 주장 거세
최근 ‘박사방’과 ‘n번방’ 사건 등을 계기로 디지털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커졌다. “미국처럼 위장수사를 폭넓게 허용하자”는 주장도 거세다. 성범죄자들이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와 가상화폐까지 이용하는데, 기존의 수사 방식만으론 검거가 어렵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총선을 앞두고 ‘위장수사 허용’을 공약으로 건 정당도 등장했고, 관련 청와대 청원엔 수천 명이 동의했다.
첫 번째 크라임신(범죄현장)은 동아일보 취재팀이 법학자들의 자문을 거쳐 국내법상 적법한 범위에서 취재한 상황이다. 아동 성 착취물 등을 제작해 유포한 ‘박사’ 조주빈(25) 일당은 A 씨처럼 ‘스폰 알바’를 미끼로 여성을 유인했다. A 씨도 성매매 권유를 넘어 다른 범행까지 의도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결국 A 씨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신뢰를 얻으려면 위조 신분증이나 신체 사진을 보내야 하는데, 국내에선 공문서위조 및 음란물 유통으로 관련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수사기관도 마찬가지다. 경찰 관계자는 “성매매 단속 때 경찰관이 10대 소녀 행세를 하면 법원이 ‘위법한 증거 수집’이라고 판단할 가능성이 있어 그런 위장수사 기법은 쓰지 않고 있다”고 했다.
반면 두 번째 크라임신은 박병식 동국대 법학과 교수가 2008년 12월 미 FBI 수사 참관 당시 직접 본 모습이다. 미국에선 수사관이 10대 소녀로 가장해 범인을 검거하는 위장수사가 10여 년 전부터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2013년 네덜란드 아동인권보호단체 ‘인간의 대지’는 컴퓨터그래픽으로 가상의 필리핀 소녀 ‘스위티’를 만들어 온라인에서 성매매 함정수사를 벌였다. 이 단체는 스위티에게 접근해 성관계를 요구한 아동 성 매수자 1000명의 명단을 인터폴에 넘겼다. 유튜브 화면 캡처
학계에선 사기꾼에서 탐정으로 전향한 프랑스 범죄학자 외젠 비도크가 1812년 자국 경찰에 도입한 ‘안보분대(Security Brigade)’를 위장수사의 시초로 본다. 이들은 노숙인 등으로 변장한 뒤 빈집털이나 소매치기 등의 범행 계획을 캐내 붙잡았다. 이후 위장수사는 서구에서 통상적인 수사기법으로 자리 잡았다.
위장수사에 법원이 처음으로 제동을 걸었던 건 1932년 12월 미 연방대법원의 ‘소럴스 사건’이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살던 보노 소럴스는 1930년 7월 위장 수사관의 권유에 못 이겨 위스키 5달러어치를 팔다 금주법을 위반했다. 연방대법원은 ‘수사관이 끈질기게 요구한 탓에 벌어진 일’이란 취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 뒤 범의(犯意)가 없는 사람을 부추겨 범행하게 만든 ‘범의유발형’은 위법한 함정수사로 봐왔다. 범의가 있던 이에게 범행 기회를 주는 ‘기회제공형’만 적법하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마약 수사도 ‘위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대법원은 2007년 7월 필로폰 소지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모 씨에게 기소 자체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김 씨가 검찰이 포섭한 정보원의 꼬임에 넘어가 필로폰을 받았다는 이유다. 반면 2013년 3월엔 마약상의 제보로 필로폰 거래 현장에서 적발된 홍모 씨에게 대법원은 징역 2년형을 확정했다. 마약상이 홍 씨에게 필로폰을 건네기 전 검찰에 미리 제보했지만, 수사기관이 마약상과 직접 관련을 맺고 함정을 판 건 아니란 취지였다.
판례가 충분히 쌓이지 않은 아동·청소년 성매매나 성 착취물 거래는 수사관이 적극적으로 위장수사에 나서기가 더 어렵다. 한 일선 경찰은 “나중에 ‘위법수사’로 결론이 나면 징계까지 받는데 사명감으로 움직이기엔 위험 부담이 많다”고 했다. 한 경찰 간부도 “피고인이 ‘위법수사’를 주장하면 수사관이 수차례씩 법정에서 증언해야 한다. 책임자로서 일선 경찰에 이런 부담을 감수하라 권하긴 어렵다”고 했다.
○ “면책 가이드라인 만들어야”
한국과 달리 미국과 영국, 호주 등은 아동 대상 성범죄에 위장수사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정부가 명확한 지침을 만들어 배포하고 △전담기관에서 수사관들에게 적법한 위장수사의 범위를 컨설팅해주며 △법원이 아동 성범죄자에 대한 위장수사의 허용 폭을 넓게 보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어둠의 인터넷’ 다크웹에서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해 온 손정우(24)의 검거도 위장수사 덕이었다. 미 국토안보수사국(HSI)은 사이트 유료회원으로 위장해 손정우의 가상화폐 지갑에 돈을 입금한 뒤 자금 흐름을 추적하는 기법을 썼다. 다크웹 전문보안업체 ‘S2W랩’의 서현민 수석연구원은 “한국 수사기관도 마음만 먹으면 이런 수준의 가상화폐 추적은 할 수 있다”고 했다.
국내에선 2013년 3월 여성가족부가 “13세 미만 아동 성매매범 단속에 한해 위장수사를 허용하자”고 제안했다가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해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 등을 감안하면 위장수사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형법이나 청소년성보호법 등에 ‘아동 성범죄에 한해 수사 절차상 위법성 조각(불성립) 사유를 폭넓게 인정한다’는 등의 문구를 추가하자는 의견도 있다. 아동·청소년보호단체 ‘탁틴내일’의 최영희 이사장은 “위장수사를 도입하면 온라인 대화방을 ‘사냥터’ 삼아 아이들을 노리는 범죄자에게 경각심을 주고 사전 범죄 예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신중론도 없지 않다. 한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위장수사 범위를 명문화하면 국가기관의 ‘속임수’를 공식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며 “특히 정부가 직접 성 착취물 사이트를 운영해 접속자를 검거하는 식의 위장수사는 부작용이 더 클 것”이라고 했다.
조건희 becom@donga.com·이소연·김소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