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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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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주말 포도밭에 여러 분들이 일손을 보태기 위해서 달려왔다. 레돔이 곡괭이로 구멍을 파고 그 안에 포도나무를 심은 뒤 귀리와 짚으로 덮은 뒤 보호 망사 씌우는 것을 선보이자 모두들 “잘할 수 있어요, 걱정 마세요!” 소리치며 곡괭이와 포도나무를 들고 흩어진다. 남자들은 손에 침을 탁탁 뱉은 뒤 기세 좋게 곡괭이질을 시작한다. 퍽퍽 땅 파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아이쿠 나자빠지는 소리를 낸다. “아아, 이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군요! 모두 몇 개의 구덩이를 파야 하는 거죠?”
“구덩이는 모두 1300개를 파야 합니다.” 레돔의 말에 모두들 비명 소리를 낸다. 설마 오늘 우리가 다 파야 하는 건 아니겠죠? 여기 돌이 있는 건 어떻게 하죠? 이 흙은 왜 이렇게 새카맣죠? 포도나무 뿌리를 적신 이 거무스름한 액체는 뭐죠? 소똥 증폭제라고요? 소똥인데 냄새가 좋군요! 이 포도 품종은 뭐죠? 쉬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이들은 와인을 좋아하는 도시의 청년들이다. 다들 부드러운 손을 가진 세련된 직장인들이다. 농사를 지어본 적은 없지만 열정에 넘친다. 서툴게 곡괭이질을 하고 그 구덩이에 나무를 심을 때 모습은 엄마 가슴에 아기를 안겨주는 것처럼 조심스럽다. 무릎을 꿇고 한 그루씩 땅의 품에 나무를 심는 그 모습은 삶에서 몇 번 없는 성스러운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참으로 지인의 메밀 빵과 수제 햄을 곁들여 시드르를 내놓으니 좋다고 달려온다. 이제 곧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복숭아나무 아래로 모여 장갑을 벗고 흙먼지를 털어낸다. 멀리서 산새들이 지저귀고 봄빛이 그들의 볼과 손등에서 부서진다. 와인 뚜껑이 유쾌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니 잔에 따르는 소리도 참 유쾌하다. 미래의 포도나무를 위해 건배를 하고 시원하게 한 잔 마시더니 또 한 잔을 더 마신다. 메밀 빵은 너무 맛있고 햄도 너무 맛있다고 난리다. 한참 일했으니 시장하고 목이 말랐을 테지.
“오늘 심은 나무 한 그루에 다들 자기 이름표를 하나씩 달고 가세요. 이 나무에서 열리는 첫 열매로 담근 첫 번째 와인을 모두 함께 나눠 마시기로 해요.” 이 제안에 그들은 와,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한다. 오늘 막대기에 불과한 나무를 심었지만 언젠가 여기서 나온 포도로 담근 술을 함께 마실 생각을 하니 오늘의 농사와 노동이 삶의 축제가 된 것 같다. 인생에 낙이 생긴 기분이다. 나무는 한순간도 쉬지 않고 땅 속으로는 뿌리를 뻗고 하늘로 키를 키울 것이다. 생각해보면 술이란 이런 마법 같은 순간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멍, 멍, 멍!”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에 다들 깜짝 놀란다. 휴식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엉덩이를 일으켜 목장갑을 끼고 모자를 쓴 뒤 곡괭이를 쥔다. 퍽, 퍽, 퍽. 곡괭이질 소리가 훨씬 더 안정적이다. 중참으로 마신 술의 힘인지, 몸속에 숨었던 농부의 피가 잠을 깬 것인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거나 우리는 지금 인생에서 아름다운 봄의 한때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