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린드그렌상 받은 백희나 그림책 작가
백희나 작가는 정교한 표정과 자세의 인형을 일일이 제작해 입체 세트에 세우고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그림책을 만든다. 실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인형들은 일상과 환상을 넘나드는 스토리텔링과 유기적으로 결합해 몰입도를 높인다. 책읽는곰 제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쓴 자국의 세계적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을 기리기 위해 스웨덴 정부가 2002년 제정했다. 상금 500만 크로나(약 6억 원)는 이 분야 최대 규모다. 백 씨는 67개국, 총 240명의 후보 중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인 최초다.
심사위원단은 “백 작가는 구름빵, 달 샤베트(셔벗), 동물, 목욕탕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미니어처의 세계 속에서 고독과 연대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풀어낸다”며 “그의 작품은 경이로운 세계로 통하는 통로”라고 평가했다.
백 씨의 작품은 더없이 일상적인 무대에서 출발해 판타지라는 작은 ‘마법의 문턱’을 넘고 독자들을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아침도 거르고 만원 버스에 치여 출근하는 아빠에게 먹으면 둥실둥실 날아오르는 구름빵을 전해주러 가는 남매(‘구름빵’)부터 아이가 아픈데도 일 때문에 퇴근하지 못하는 워킹맘을 대신해 밥도 차려주고 간호도 해주는 ‘일일 엄마’ 선녀(‘이상한 엄마’), 무더운 여름날 더위에 녹은 달로 셔벗을 만들어 나눠주는 할머니(‘달 샤베트’)까지 현실의 비애를 아름다운 동화적 문법으로 어루만진다.
개인 사정으로 현재 태국에 체류 중인 작가와 10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일상 속 작은 판타지’는 당신의 신비로운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림책 ‘이상한 손님’
‘어두운 시대’라고는 하지만 그의 작품은 고독이나 역경 속에 있을지언정 세상과 사람에 대한 유머와 애정을 잃지 않는다. 비 오는 날 어른들 없이 집에 남겨진 남매에게 길을 잃은 아기 도깨비 달록이가 나타나 친구가 돼 주고(‘이상한 손님’) 어느 집에서나 한 번쯤 키워봤음 직한 잡종견 구슬이의 시선으로 뭉클하게 가족애가 그려진다(‘나는 개다’). 소소하지만 따뜻한 상상력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입체 세트 안의 인형을 촬영한 ‘컷아웃’ 방식 덕분에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듯 몰입도가 높다. 현실과 가상의 절묘한 경계에 선 스토리텔링과 입체적 제작 기법이 결합해 재미와 감동을 배가시킨다.
―정교한 인형 세트를 만든 뒤 사진 촬영하는 독특한 방식은 어떻게 탄생했나.
“교육공학을 전공한 뒤 시청각교육 자료를 만드는 회사에서 기획·디렉팅 업무를 했다. 그런데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았다. 협업보다는 혼자서 진득이 뭔가 하는 편이 내겐 더 어울렸고, 지휘나 조율보다는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회사를 관두고 애니메이션을 다시 공부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위한 스토리텔링을 영화적인 연출 방식으로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작업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든다. 입체 세트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전체 스토리 안에서 그 장면이 어떤 역할을 할지 정교하게 연구해야 한다. 구상을 마치면 표정과 자세, 옷차림까지 실제 인형으로 하나하나 구현해야 한다. 그는 “공정이 길고 고되지만 외골수 기질이 이런 작업에 최적화한 것 같다”고 했다. 오랜 사전 공정을 끝낸 뒤 실제 연출을 마치고 조명까지 모두 세팅하고 사진을 찍을 때, 그 세트에 주인공이 실재하는 것처럼 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그는 그때를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하던 물건 중 하나인 인형을 사 모으는 수집벽은 여전하다. 유학 시절에는 상점까지 한참을 걸어가 바비 인형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게 낙이었다. 가끔 하나씩 사와 작업 책상에 놓고 위안 삼으며 일했다. 바비뿐만 아니라 옷을 갈아입힐 수 있는 인형은 다 좋아한다. 인형이 얼마나 많냐고 묻자 “솔직히 셀 수 없이 많다”며 웃었다.
―인형이 왜 그렇게 좋은가.
“내가 정해 놓은 세상에서 실제 살아가는 존재 같아서 좋다. 인형이 생기면 ‘어떤 곳에 사는 이런 아이에게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고’ 하는 식의 스토리를 상상해보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히 그림을 그려보기도 하고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인형놀이’를 했다.”
오랫동안 인형을 만지작거리며 만들어낸 이야기가 처음으로 책이 돼 나온 것이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구름빵’이었다. 출산 후 산후조리차 한국에 와 있던 때, 지인을 통해 한 출판사의 아동전집 시리즈 중 한 권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사랑받은 이 책이 그에게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당시 출판계 관행대로 맺은 ‘매절계약’(출판사가 저작자에게 일정 금액만 지급하고 향후 저작물 이용 수익을 독점하는 계약) 때문에 책이 2차 콘텐츠 등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해도 저작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출판사를 상대로 저작권 소송을 냈지만 올해까지 1, 2심 모두 패소했다.
백 작가는 매년 봄 새로운 책을 내왔지만 올해는 그 여파로 아무런 작업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다시는 책을 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싶을 만큼 몸이 많이 아팠다. 그때 일어난 마법 같은 일이 린드그렌상 수상이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비슷한 이름의 다른 상이 스웨덴에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수상 소감에서 ‘심폐소생술을 받은 기분’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도 ‘구름빵’은 표지조차 넘기지 못하는, 내가 썼음에도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는 책이다. 마냥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됐다. 하지만 정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작가로서 인정을 받았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많이 회복됐다. 이 상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스웨덴 국민작가의 이름을 따서 세금으로 외국인에게 주는 상이다. 어린이와 청소년 문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종사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스웨덴 국민이 세상에 주는 상’이라고 하더라. (창작자에 대한 인식이) 우리와는 격차가 크다고 느꼈다.” 백 작가는 “노벨상에 버금가는 큰 상이어서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상의 의미가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그림책 작가들은 라가치상(이탈리아의 세계적인 아동문학상)을 받는 등 이미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고 단시간에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그림책 작가여서 자긍심을 느낀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접하는 문학작품이면서도 노인이 돼서까지 즐길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급적 많은 책을, 책임감을 갖고 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토양이 더 좋은 작품과 작가의 탄생을 북돋아 줄 만큼 충분히 성숙한지 여전히 염려를 느낀다.
―우리 아이들과 아동문학을 위해 무엇을 더해야 할까.
“‘노키즈존’ ‘맘충’ ‘n번방 사건’ 등 우리 사회에서 아동 인권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아동과 관련된 음란물에 대해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해왔다. 아이들 인권과 안전이 보호받는 장치가 없는 사회에서 이들을 위한 작가의 권리는 얼마나 보잘것없겠는가. 선례는 항상 큰 영향을 미친다. 법을 소극적으로 해석해서 결론내리는 데만 치중하지 말고 정말 지향해야 할 방향으로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 백희나 작가는 (1971년생)
△ 이화여대 교육공학 학사
△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 캐릭터애니메이션 학사
△ 2005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픽션 부문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 2013년 제3회 창원아동문학상,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
△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 이화여대 교육공학 학사
△ 미국 캘리포니아예술대 캐릭터애니메이션 학사
△ 2005년 볼로냐 아동도서전 픽션 부문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 2013년 제3회 창원아동문학상,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 어린이청소년 부문 수상
△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 수상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