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벨로스 ‘뎀프시와 피르포’, 1924년.
1923년 9월 14일 역사적인 세계 헤비급 챔피언전이 뉴욕에서 열렸다. 미국의 복싱 스타 잭 뎀프시의 5차 챔피언 방어전이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도전자 루이스 앙헬 피르포 역시 세계 최정상 선수 중 한 명으로 중남미 출신의 첫 세계 챔피언 도전이라 큰 주목을 받았다. 대결을 보기 위해 몰려든 8만6000명의 관객이 관중석을 가득 메웠다. 경기가 시작되자 뎀프시는 단 1분 30초 만에 피르포를 무려 일곱 번이나 쓰러뜨렸다. 당시만 해도 세 번 녹다운에 경기가 끝나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불과 30초 후 반전이 일어났다. 뎀프시는 도전자가 날린 훅에 턱을 세게 맞아 링 밖으로 몸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이때 뒤통수가 타자기에 부딪혀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관중은 그를 다시 링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극적인 1라운드가 끝나고 2라운드가 시작되자 뎀프시의 반격이 시작됐다. 두 번 연속 피르포를 녹다운시킨 후 단 57초 만에 완승을 거뒀다.
최후의 승자는 뎀프시였지만 그림은 피르포가 챔피언을 링 밖으로 쓰러뜨리는 극적인 찰나를 묘사하고 있다. 일곱 번을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선 피르포의 도전에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었는지 화가는 그림 맨 왼쪽에 자신을 관중으로 그려 넣었다. 비록 챔피언은 못 됐지만 피르포는 도전의 아이콘이 됐다. 중남미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거리와 학교, 축구팀이 생겨났다. 역사는 승자만을 기억하지만 화가는 패자의 가장 빛났던 역사를 우리에게 영원히 각인시킨다. 어쩌면 이는 수많은 패자들에 대한 응원과 위로일지도 모른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