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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포커스]남부-북부 경제격차, 코로나로 더 심각해져… ‘하나의 유럽’ 흔들

입력 | 2020-04-18 03:00:00

코로나19로 커지는 EU 내부균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럽을 찢어놓고 있다. 유럽 각국은 사태 초기부터 유럽연합(EU) 차원의 공동 대응이 아닌 각자도생 위주의 자체 대처로 일관해 위기를 증폭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유로와 함께 EU의 양대 축을 형성했던 솅겐협정은 이미 깨졌고 EU 공동채권(코로나본드) 발행을 둘러싼 갈등도 상당하다. 상황을 낙관하는 일부 국가가 봉쇄 조치 완화에 나선 가운데 한쪽에선 봉쇄를 강화하는 등 코로나19 출구 전략도 제각각이다.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2015년 시리아 난민 유입, 2016년 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가결 이후 누적됐던 EU 분열이 코로나19 사태로 극한에 다다랐다는 지적도 나온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2일 부활절 미사를 집전하며 “EU는 분열할 때가 아니다. 유럽을 넘어 전 세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이례적으로 호소했다. 정치인이 아닌 교황이 EU의 단합과 연대를 주문해야 할 정도로 분열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 코로나본드 등 분열 극한

국제 통계사이트 월드오미터에 따르면 17일 기준 전 세계 확진자와 사망자는 각각 219만 명과 14만 명을 돌파했다. 이 중 유럽의 비중은 각각 46%(102만 명) 64%(9만 명)다. 감염자 수 상위 10개국에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벨기에 등 유럽 6개국이 올라 있다.

전 유럽이 코로나19로 휘청이자 지난달 26일 EU 27개 회원국 정상은 화상회의를 열고 EU 공동채권인 코로나본드 발행 등 경제 대책을 논의했다. 당초 3시간으로 예정됐던 회의가 6시간으로 길어졌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각국 재무장관이 이달 7일 16시간의 추가 협상을 벌였지만 역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6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서 “기금을 담보로 회원국이 채권을 공동으로 발행하고 공동으로 보증해 자금을 조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는 “지금은 사실상 전시(戰時) 상태다. 획기적인 재정 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도 “세계 금융위기 이후 EU 분열이 커졌고 각국에서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가세했다.

EU 최대 경제대국 독일을 이끄는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채권 발행 대신 2012년 설립된 유로존 구제금융기금 ‘유럽안정화기구(ESM·European Stability Mechanism)’를 이용하자고 맞선다. 그는 남유럽 재정위기 여파가 가시지 않던 2012년 공동채권 발행 논의가 등장했을 때도 “내가 살아있는 한 발행은 없다”며 강력히 반대한 후 ESM 설립을 주도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도 채권 발행을 반대했다.

독일과 잘사는 북유럽 국가에 비해 신용등급이 낮은 이탈리아, 스페인 등은 EU 공동으로 채권을 발행하면 독자적으로 국채를 발행할 때보다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출 수 있다. ESM을 통한 자금 지원은 공동채권 발행 때보다 훨씬 강도 높은 구조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부대조건이 엄격하다 보니 남유럽은 ESM을 통한 지원을 꺼린다.

반면 부유한 북유럽은 자국의 경제 부담이 늘어난다는 이유로 공동채권 발행에 반대한다. 또 남유럽이 자국의 방역 실패 및 재정건정성 악화 책임을 EU 전체로 떠넘긴다는 인식이 강하다. 봅커 훅스트라 네덜란드 재무장관은 “일부 정부는 그들 스스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재정이 왜 부족한지부터 공부해야 한다”고 말해 남유럽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이 와중에 8일 EU 과학기구 유럽연구이사회(ERC)의 수장인 마우로 페라리 의장(61)이 돌연 사임했다. 1월 의장에 오른 지 석 달 만이다. 이탈리아 유명 과학자인 그는 “코로나에 대처하기 위한 대규모 연구를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EU 체제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고 토로했다. 백신 개발 등 회원국 간 의료정책 공조 부재, 일방적인 국경 폐쇄 등이 문제라는 취지다.

2007년 설립된 ERC는 지난해 예산만 20억 유로(약 2조7000억 원)에 달한다. EU 분열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 남유럽 反EU·反독일 정서 고조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서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등을 거치며 사실상 EU 최대 주주인 독일에 의해 가혹한 구조조정을 당했다는 피해의식이 뿌리 깊다. 또 EU 통합의 과실이 모두 독일, 네덜란드 등과 잘사는 북유럽 국가로 쏠렸다는 반감도 상당하다. 남유럽 경제 현실에 맞지 않는 유로를 도입한 결과 자국 내 물가 상승 압력만 고조되고 빈부 격차만 심해졌다는 논리다.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사태는 남유럽의 반(反)EU 정서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는 코로나19 사태 초기 다른 EU 회원국이 신속한 지원을 해주지 않아 사태가 악화됐다는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유럽합중국’ ‘하나의 유럽’을 운운할 때는 언제고 대형 위기가 터지자 본인 살기에 바빠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만이 대단하다.

EU 보건장관들은 지난달 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당시 사망자 속출로 신음하던 이탈리아는 보호장비 지원 등을 기대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체코는 자국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 마스크, 일회용 장갑 등 위생용품에 대한 수출 제한을 실시했다. 이 틈을 중국이 파고들었다. 항바이러스제, 의료 인력 등을 파견해 환심을 샀다. 역시 EU 회원국이 아닌 러시아도 지원에 동참했다.

발행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코로나본드를 발행할 때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의 최종 승인을 얻어야 한다. 지난해 11월 EU 최초의 여성 수장이 된 그는 독일 국방장관 출신이다. EU로부터 어떤 지원을 얻으려 해도 사사건건 독일의 ‘윤허’를 얻어야 한다는 점이 이탈리아 국민의 반감을 부추기고 있다.

FT에 따르면 3월 이탈리아 전국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EU에 속해 있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답했다. 2018년 12월(47%)보다 20%포인트 상승했다. 카를로 칼렌다 EU 이탈리아 상임 대표 역시 FT에 “이탈리아가 왜 EU에 남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편지를 많이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 경제 격차 갈수록 심화

양측 갈등의 핵심은 ‘돈’이다. 1999년 유로 도입 결정 후 21년간 북유럽과 남유럽의 경제 격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독일의 팽창과 대조적으로 재정위기를 겪은 남유럽 4개국, 즉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의 하락세가 두드러진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08년 3조7300억 달러(약 4662조 원)였던 독일 국내총생산(GDP)은 2018년 3조9480억 달러(약 4935조 원)로 늘었다. 같은 기간 이탈리아는 2조3990억 달러에서 2조840억 달러로, 스페인은 1조6250억 달러에서 1조4190억 달러로 감소했다. 포르투갈, 그리스의 GDP도 모두 줄었다.

2019년 기준 이탈리아의 실업률은 9.7%지만 독일은 3.2%에 불과하다. 이탈리아의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 역시 134.8%로 독일(61.9%)의 2배 이상이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기준 이탈리아의 국가 신용등급은 BBB로 최고 AAA 등급인 독일보다 여덟 계단 낮다. 양측의 생산성 및 소득 격차도 상당하다.

산업 구조와 문화도 다르다. 북유럽은 제조업과 지식서비스 산업이 핵심이다. 4차 산업혁명의 수혜를 얻을 수 있고 경제위기 시 버틸 여력이 탄탄하다. 남유럽은 관광, 음식, 패션 등 대면(對面) 서비스와 자영업 비중이 높아 코로나19와 같은 대형 위기 때 취약한 편이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남유럽 재정위기 당시인 2011년 FT에 “북유럽 국가는 역사적으로 즉각적 소비보다 장기 투자를 중시했지만 남유럽 국가들은 2003년 이후 과도한 소비를 이어왔다”고 지적했다. ‘일단 쓰자’는 남유럽과 ‘쟁여놓자’는 북유럽의 의식구조가 다르다는 의미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 또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확진자는 모두 10만 명을 넘어섰지만 17일 기준 이탈리아 사망자는 2만2170명, 독일은 4093명이다. 이를 가른 요인으로 GDP 대비 보건 지출, 인공호흡기와 병상 수 차이 등이 거론된다. 독일의 GDP 대비 보건 지출 비중은 11.1%지만 이탈리아는 8.9%에 불과하다. 또 인구 1000명당 병상 수도 독일은 8개인 반면 이탈리아는 3개에 불과하다. 인공호흡기 역시 2만5000개와 3000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 양극화로 포퓰리즘 득세


남유럽의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이것이 반EU 정서 및 포퓰리즘 정당의 득세를 부추기는 악순환도 나타나고 있다.

EU 통계국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지니계수는 2008년 0.312에서 2018년 0.334로 상승했다. 같은 기간 스페인도 0.324에서 0.332로 증가했다. 값이 커질수록 불평등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PIGS 4개국의 지니계수는 모두 유로존 평균(0.308)보다 높다. 스페인 통계청에 따르면 2010년 이후 연간 최대 30만 명의 30세 이하 스페인 청년이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코로나19 사태로 가뜩이나 어려운 유럽 경제가 더 큰 부진에 빠질 가능성도 높다. 이에 따른 양극화 심화, 포퓰리즘 발호 등이 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 등 EU의 존립 근거를 뒤흔들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반난민 정책으로 유명한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는 지난달 국가 비상사태를 무기한 연장해 사실상 종신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역시 반난민·반EU를 기치로 내건 이탈리아 극우정당 ‘동맹’의 마테오 살비니 대표 역시 최근 “코로나19 위기를 해결한 후 EU를 떠나자”며 이렉시트(이탈리아의 EU 탈퇴) 논쟁을 부추겼다.

코로나19 사태가 지나간 후 EU의 미래를 둘러싼 전망은 엇갈린다. 2일 미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안토니우 코스타 포르투갈 총리는 북유럽이 코로나본드 발행 논의를 저지하자 “EU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존재 가치가 없다”며 분노를 표시했다. 도날트 투스크 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역시 “남유럽 재정위기 때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더 위험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나탈리 토치 이탈리아 국제문제연구소장은 아예 “코로나19가 새로운 갈등을 야기한 게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갈등을 증폭시켰을 뿐”이라며 상당 기간 유럽의 분열이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반면 유럽 전문가인 고주현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는 당장 EU 회원국 탈퇴가 이어지는 식의 급속한 체제 변화는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중도자유 세력과 극우 등 급진세력의 세력 다툼이 이어지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중도자유 세력이 난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하면서 ‘갈등 속 통합’을 유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파리=김윤종 특파원 zozo@donga.com / 이윤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