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1999년 외환위기 이후 최저 수준인 배럴당 15달러 선으로 미끄러졌다.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원유 수요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일 오후 5시 30분(한국 시간) 5월 인도분 미국 서부텍사스산 원유(WTI) 선물은 배럴당 14.71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전 거래일 대비 20% 가까운 폭락세를 연출하고 있다. WTI가 장중 배럴당 15달러 밑으로 떨어진 건 약 21년 만에 처음이다. 영국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도 북해산 브렌트유 6월 인도분은 장중 25% 넘게 하락하고 있다.
산유국들이 역대 최대 규모 감산에 합의하며 공급 조절에 나섰지만 유가 하락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이달 13일 산유국과 OPEC플러스(석유수출국기구와 10개 주요 산유국 협의체)는 하루 970만 배럴 감산에 합의했다. 하지만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경제 활동 중단으로 감소된 원유 수요가 2000만~3000만 배럴에 이른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공급 축소 효과가 거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다만 이날 유가 폭락은 원유 투자자들의 월물 교체 변수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물을 거래하는 원유의 특성상 투자자들은 선물 만기일인 21일 전까지 5월 인도분 WTI를 실물로 인수하거나, 6월 인도분 선물로 바꾸는 거래를 해야 한다. 현재 재고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실물 인수에 나설 이유가 없다보니 대부분 5월 선물을 6월로 교체하게 되면서 5월 선물 가격이 폭락했다는 것이다. 심혜진 삼성증권 연구원은 “시장에 새로운 악재가 적용되는 게 아니라, 선물 거래의 이벤트 탓에 변동성이 커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제유가가 상승할만한 요인이 부족한 만큼 당분간 저유가가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앞서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가 이루어진 뒤 미국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3분기(7~9월)까지는 배럴당 20달러 선에 머무를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블룸버그는 “이대로 가면 원유 생산업체들이 구매자에게 돈을 주고 원유를 넘기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이건혁 기자 g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