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관료는 나와 무관’ 日사회… 코로나 대응 실패 방치한 원인 民心이 정치에 영향 주는 우리나라, 전문가 리더십과 결합 땐 빛 발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일본 정부는 적극적으로 감염 여부를 검사하지 않았고, 의료전문가들 중에서도 ‘숨이 가빠 괴로울 정도가 아니면’ 검사 요청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 더 이해되지 않는 것은 일본 시민들이 이를 순순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와 의료계의 방침에 크게 항의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감염 사실을 쉬쉬하는 사람도 다수 있다고 한다. 알려지면 이웃의 눈총을 받게 되고, 주변에 ‘메이와쿠(민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이 민심(民心)의 나라라면, 일본은 엘리트, 그중에서도 ‘야쿠닌(役人·관리 혹은 공무원)’의 나라다. 일본인의 인식에 관리나 정치인은 ‘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일반 시민은 일반 시민의 일이 있고, 그들은 그들의 세계와 일이 있다. 각자의 ‘야쿠(役·역할)’가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일본인들은 정치에 관심도 비판도 없다. 알아서 해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의 위정자, 엘리트들은 그에 부응해 자신들의 ‘야쿠’를 잘 수행해 왔다. 일본 사회에서 엘리트의 신뢰도가 높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대략 1990년대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야쿠닌들이 부패하고 무능해진 것이다. 일본 최고의 엘리트 그룹인 대장성(大藏省·우리의 기획재정부) 부패 사건이 잇따라 발생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리더십은 관료 사회에서 정치가로 넘어갔다. 이들은 더 무능했다.
그 대척점에 한국이 있다. 애초에 야쿠라는 게 없다. 직업은 언제든 바꿀 준비가 돼 있고, 내 직업을 굳이 자식이 하길 원하지 않는다. 내 일보다는 ‘남 일’에 관심 많은 사람이 부지기수다. 가장 만만한 남 일은 정치다. 내 일 팽개치고 남 일인 정치에 비말을 날리며 울부짖는 건 한국 시민의 일상사다. 놀랄 만큼 많은 수의 시민이 자기 분야보다 정치에 더 해박한 지식과 정밀한 분석을 선보이는 ‘신공’을 갖고 있다. 이러니 민심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참고로 중국어나 일본어에서 민심은 사전에나 존재할 뿐 일상어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늘 각자도생이 먼저이면서도 공동체 붕괴의 위기 때는 온갖 아이디어와 충심을 발휘하며 다이내믹하게 대응한다. 금 모으기 운동과 이번 코로나 대응은 그 백미였다.
그러나 스마트한 민심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돈 들여 전문가를 양성할 필요 없이 모든 일을 여론조사로 결정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가 의료전문가들의 지혜 없이 극복될 수는 없다. 전염병 확산이라는 워낙 다급한 사태가 전문가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측면도 있다.
다른 문제라면 어떨까. 당장 내 건강이나 이해에 직결되지 않는 듯이 보이는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들 말이다. 경제 전략, 대일(對日) 외교, 교육 정책 등, ‘스마트한’ 민심이 전문가의 견해와 판단을 무력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는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고 간섭하는 다이너미즘이 전문가의 리더십과 절묘하게 결합하며 빛을 발했다. 열심히 각자도생, 백가쟁명하면서도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을 감시하고 그녀의 판단을 따랐다.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도 정 본부장에게 외압을 가할 수 없었을 것이며, 정 본부장 역시 전문적 판단 외에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 다른 분야에서도 ‘제2, 제3의 정은경’을 찾아내고 키워주자. ‘정은경과 스마트 민심’의 결합, ‘한국형 선진사회’의 모델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