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1559∼1626)는 중국 청나라의 태조다. 변방의 약소 부족으로 경시받던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을 세워 청나라의 기틀을 닦았다. 오른쪽은 1619년 3월 후금이 싸얼후(薩爾滸) 지역에서 명나라 연합군을 물리친 ‘싸얼후 전투’ 그림.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여진족이 강대국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1998년 역사학자들은 ‘만주학회’를 창립해 만주 지역(동북삼성)에 등장한 여러 민족과 역사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진족의 성장 배경과 과정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 농업 생산력의 증대
여진족은 12∼13세기에 금나라를 건국해 화북에 거주하는 한족을 지배하다가 몽골에 멸망합니다. 몽골이 세운 원이 멸망한 이후에도 여진족은 몽골, 조선, 명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세력이 약했습니다. 15∼16세기 여진족은 몽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해서여진 4개 부족, 명과 조선의 영향을 받는 건주여진 5개 부족, 두만강 북쪽의 야인여진 4개 부족이 흩어져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15세기경 여진족은 점차 농업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명과 조선에서 수입한 농우, 농기구를 이용해 농지를 개간했고, 점차 농업에 유리한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 요동지역으로 진출했습니다. 명과 조선은 철과 농우의 수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통제했지만, 여진인은 자신들이 생산한 모피, 말, 산삼 등을 이용해 더 많은 철과 농우를 수입했습니다. 또 명과 조선의 국경지대에 침입해 농민을 잡아가서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 교역의 확대
여진과 명, 조선 간의 무역량은 점차 증가합니다. 명은 개원, 광녕, 무순에 시장을 개설했고, 이후 청하, 애양, 관전에도 마시(馬市)를 열었습니다. 초기에는 생필품 교환 수준이었지만, 명의 궁정과 지배층은 모피를 점차 대량으로 수입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시에서 거래하는 여진족 상인이 급증했습니다. 임진왜란 전후 마시의 여진족 상인은 1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여진족은 인삼도 명에 수출했습니다. 특히 백두산 인근에서 인삼을 채취해 명 상인에게 팔았습니다. 조선 역시 인삼을 물에 쪄서 제조하는 파삼(把蔘)을 만들어 명에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여진족은 햇볕에 말린 인삼, 조선은 물에 쪄서 가공한 인삼을 명에 수출하며 치열하게 경쟁했습니다. 여진족은 더 많은 인삼을 구하기 위해 조선 국경을 몰래 침범했고, 선조 28년(1595)에는 인삼을 채취하는 여진족 40명이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 누르하치의 등장과 대륙 지배
누르하치 집안은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명의 관리들과 친분을 쌓고, 명으로부터 받은 공무역의 권한을 이용해 성장했습니다. 누르하치는 명의 신뢰를 얻어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높이면서 다른 여진 부족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차지했습니다. 누르하치는 25세가 되는 1583년부터 선조가 물려준 군대를 이끌고 주변의 건주여진을 정복했고, 1588년에는 건주 5부를 통일하는 데 성공합니다.
누르하치는 여진 부족 통일 과정에서 팔기(八旗)제도를 정비했습니다. 1601년 누르하치는 300명을 1니루라고 부르고 니루어전이 지휘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4개의 니루가 4가지 깃발을 사용하여 4기라고 했고, 1615년경에는 약 200개의 니루가 8개의 깃발을 사용해 8기라고 불렀습니다. 팔기제가 완성된 시기 1기의 병사는 7500명이었으며, 지휘관은 누르하치의 아들과 조카가 담당했습니다.
누르하치는 요동지역에 주둔하던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파병되자 군사력을 확대하고 여진 부족의 통일에 전념했습니다. 이때 요동에 거주하는 한족들은 명나라가 세금과 요역을 과도하게 징수하자 여진지역으로 이주했습니다. 그 결과 여진지역의 인구가 점차 증가해 50만∼70만 명에 달했습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