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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애도[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20-04-22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불의에 침입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우리는 상실과 애도의 험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가족, 돈, 생활, 기회를 잃었습니다. 상실은 마음을 슬픔으로 채우고 자책과 우울증도 불러옵니다. 자존감은 추락하고 생존은 위협받습니다. 지키고자 했던 가치의 상실도 애도로 이어집니다. 얻는 사람이 있었으니 잃은 사람도 생깁니다. 목에 힘을 줄 필요도, 고개를 푹 숙일 일도 없습니다만 세상은 묘하게 돌아갑니다. 삶의 에너지는 오늘도 내일도 순환을 거듭합니다. 상실이 마음에 입힌 상처를 치유하려고 사람들이 하는 가장 쉬운 짓은 남 탓을 하는 겁니다. 자신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에 대해 남에게 책임을 묻는, 투사(投射)는 늘 달콤합니다. 하지만 오래 즐기는 달콤함은 마음 건강의 합병증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상실은 ‘잃어버림’입니다. 사전에서 찾아보니 물건, 사람, 관계, 땅, 기회, 몸, 감정, 의식, 모습, 상태, 길, 방향, 의미, 돈에 관해 폭넓게 쓰입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상실의 연속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물론이고 이별, 배신, 실직, 사고, 질병, 경제 위기 등으로 잃어버릴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상실의 후유증은 예측할 수 없었을 때 증폭되어 나옵니다. 상실감 해소에 필요한 시간은 길에 떨어뜨린 손수건에 속상해하는 짧은 시간에서부터 헤어진 가족을 그리는 평생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습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으려고 길거리에서 펄럭이는 낡은 현수막은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상실이 깊으면 빼앗김과 섞이면서 분노가 솟구칩니다.

상실을 따라오는 애도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이와 달리 애도의 대상으로 사람, 직업, 소유물은 물론이고 관계, 이상, 꿈, 희망, 건강, 젊음 같은 가치도 포함합니다. 뒤바뀐 현실을 느리고 복잡하게 인정해야 하는 애도의 고통을 숨기는 일도 고통을 더합니다. 남이 묻습니다. 대답한다고 이해할까요? 그 사람이 이해한다고 도움이 되나요? 나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모습을 숨깁니다.

임종 환자들에 관해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가 기술한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다섯 단계를 확대 적용하는 경향이 있지만, 애도는 극히 개인적인 과정입니다. 순서를 지키거나 모든 단계를 경험하지도 않습니다. 삶의 평정심이 무너지며 잠이 안 오고 일이 손에 안 잡혀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자존감이 완전히 무너지는 병적인 애도를 제외한다면 애도는 상실에 대한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반응입니다. 오히려 상실을 부정하고 애도 감정에 무감각하다면 비정상입니다. 억압해도 결국 터져 나옵니다. 직면과 극복이 빠른 길입니다. ‘표준 처방’은 없습니다. 할 수 있는, 너무 힘들지 않은 일을 내 상황과 성격에 맞춰서 해야 합니다.

첫째, 상실을 인정하고 애도의 고통을 받아들이십시오. 상실이 크면 현실을 인정하기 어려워지고 부정(否定)이라고 하는 방어기제를 쓰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됩니다.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화를 내도 됩니다. 고통스러워도 느낄 것은 느껴야 합니다. 억지로 마음에서 지울 수는 없습니다. 잊어야 꼭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잊지 않으면서도 삶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슬픔, 분노, 고통을 극복하고 삶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 일이 건강한 애도의 핵심입니다.

둘째, 애도가 몸과 마음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몸은 피로, 체중 변화, 통증, 면역력 저하 등을 겪고 마음은 불안과 우울을 겪을 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몸을 움직여서 마음의 고통을 상쇄하십시오. 심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는 하나 애도 자체가 우울증은 아닙니다.

셋째, 애도가 매우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도움을 받는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힘든 자신에게 솔직해야 합니다. 애도는 슬픔으로 이어지고 슬픔은 허무함, 절망, 그리움, 외로움이라는, 거대한 막막함으로 다가옵니다. 믿을 수 있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꼭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넷째, 애도에 따르는 감정 중 하나는 죄책감입니다. 그 일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할 것처럼 느끼는 겁니다. 죄책감은 우울증으로 번지기 쉬우니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다섯째, 분노는 애도의 동반자입니다. 말없이 떠난 사람에게, 냉담한 세상에 대해, 응답이 없는 절대자에게 분노합니다. 상처 입은 자신의 취약함과 유한함에 대한 두려움이 들면서 분노는 증폭됩니다. 여섯째, 애도는 장기전이며 소모전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칩니다. 건강과 자존감을 지켜야 합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인정하면서, 과도하지 않으면 억누르지 않고, 술은 멀리해야 합니다. 진정제 같은 약물도 아껴 쓰면서 애도를 피하지 않고 마주 봐야 합니다. 떠난 사람에게 사랑과 미움이 교차했었어도 좋은 기억을 떠올리면서 묵묵히 살아가야 평안해집니다. 가끔 허탈하게 웃어도 됩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