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기획/동아일보 100년 문화주의 100년] <6> 동아일보가 그려낸 민족의 표상
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민족정신을 고취해왔다. 사진은 1931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동아일보가 이듬해 6월 5일 개최한 충무공 새 영정 봉안식 화보 지면(1932년 6월 7일자). 봉안식에는 3만여 명이 운집해 겨레의 축제장이 됐다. 동아일보DB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동아일보는 지면에 반복적으로 단군 이야기를 실었다. 창간 후 첫 사업으로 1920년 4월 11일 ‘단군은 우리 민족의 종조(宗祖)’라며 단군 영정을 현상 공모했다. 이 사업은 제1차 무기(無期) 정간으로 결실을 거두지는 못했다. 하지만 1925년 11월 18일(음력 10월 3일) ‘개천절’이라는 사설에서 단군의 개천 기원을 강조하면서 민족 역사의 장구함을 널리 알렸다. 그런데 1926년 일본인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중국인 기자(箕子)의 자손이 조선을 지배한 것이 한민족 역사의 시작이라고 왜곡하면서 단군을 부인했다. 한국 역사의 첫머리가 한사군(漢四郡)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꾸며내어 한국이 자주적인 민족주체를 구성하지 못한 채 대륙에 종속돼 왔다는 주장을 합리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는 ‘단군 부인(否認)의 망(妄)’이라는 논설을 1면에 발표해 민족의 기원을 부정하고 이를 말살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의 망동을 규탄했다. 그리고 최남선의 ‘단군론’을 77회에 걸쳐 연재하도록 했다. 이 글은 일본인들의 단군부정론에 맞서 단군의 존재를 종교 역사 문화적으로 자세히 살핀 방대한 연구다. 식민지 상황에서 단군의 존재를 사상적으로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적 의미에서 ‘한국학’ 연구의 방법적 기반까지 확대했다. 1932년 두 달에 걸쳐 연재된 현진건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는 단군의 존재를 입증해 보이는 성지 기행의 글로 유명하다.
동아일보는 백두산을 신문지면에 올림으로써 한국 민족이 문명의 기원을 발견하고 민족 고유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감격을 맛볼 수 있게 했다. 당시 일제는 일본 열도를 두고 내지(內地)라는 말을 썼다. 일본이 새로운 동아시아 근대문명의 심장부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백두산은 이 일본 중심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거대한 민족의 표상이었다.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강원 횡성군 횡성 3·1운동 기념비. 동아일보DB
동아일보가 내세운 또 하나의 민족 표상은 겨레의 꽃 무궁화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는 창간사 서두에 ‘동방 아시아 무궁화동산 속에 2천만 조선민중은 일대 광명을 견(見)하도다’라고 밝혀 창간정신이 ‘무궁화동산’에 뿌리를 두었음을 선언했다. 무궁화는 은근과 끈기를 상징한다. ‘무궁화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죽어버리면 다른 꽃송이가 또 피고 또 죽고 또 피고 하여 끊임없이 뒤를 이어 자꾸 무성합니다. 바람에 휘날리는 무사도를 자랑하는 사쿠라보다도, 붉은색만 자랑하는 영국의 장미보다도, 덩어리만 미미하게 커다란 중국의 함박꽃보다 얼마나 끈기 있고 꾸준하고 기개 있습니까.’ 1925년 ‘조선 국화(國花) 무궁화의 내력’이란 기사는 무궁화의 끈질긴 생명력과 기품이 그대로 민족의 얼굴이며 정신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조선왕실의 꽃은 자두(오얏)나무 꽃, ‘이화(李花)’였다. 그렇지만 한국 민중에게 나라를 대표하는 꽃으로 인식된 것은 무궁화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연설 때마다 ‘삼천리 무궁화동산’이라고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1면 ‘동아일보’ 제호의 바탕에 무궁화로 수놓은 한반도를 그려 넣었다. 1930년 1월 1일 신년호부터 고정된 이 도안은 1938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으로 강제 삭제되기까지 8년 동안 사용됐다.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4·19혁명의 생생한 현장을 담아낸 사진화보 ‘민주혁 명의 기록’.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광복 후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지키는 데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에 미처 다루지 못한 3·1운동의 진면목을 복간 두 달 만인 1946년 2월 집중 조명하면서 이날을 ‘민족의 날’로 명명하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되새겼다. 3·1운동이야말로 단합된 민족의 의지가 가장 숭고한 것임을 보여준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1965년 창간 45주년을 맞아 동아일보는 ‘3·1운동 기념비 건립운동’을 새롭게 추진했다. 도별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던 유서 깊은 고장을 두 곳씩 선정해 ‘3·1운동 기념비’를 세우기로 하고 각계의 성원을 얻어 이를 실천에 옮겼다. 3·1운동 기념비는 전북 익산(당시 이리)에서부터 서울 영동 횡성 남원 양양 강진 임실 영암 안동 등지에 차례로 세워졌다.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하자 동아일보는 4월 22일 ‘희생자들을 위한 위문금품 접수’를 사고(社告)로 게재하고 곧바로 희생자 위령탑 건립 계획을 발표했다. ‘불의에 대한 불퇴전의 항쟁에서 귀중한 생명을 던진 분들은 민주주의 소생의 지주로서 길이길이 우리 민족의 존숭(尊崇)의 표적’이라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했다. 위령탑 건립운동은 즉각 독자의 호응을 얻어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금이 모였다. 뒤에 주관처가 바뀌었지만 1963년 여름 ‘4월학생혁명기념비’가 서울 강북구(당시 성북구) 수유동에 세워졌다. 이곳은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한 영령이 잠든 혁명정신의 성소(聖所)가 됐다. 동아일보는 4·19혁명의 생생한 투쟁 현장을 그대로 담아낸 사진화보 ‘민주혁명의 기록’을 그해 6월 펴냈다. 수록한 사진은 동아일보 사진기자들이 찍은 것으로 자유 민주의 신념을 지켜낸 4·19혁명의 정신을 재현하는 역사적 기록이 됐다.
동아일보가 걸어온 100년 역사 곳곳에는 자주와 독립, 자유와 민주를 갈망해 온 민족의 표상이 새겨져 있다. 이는 동아일보가 문화적 실천에 민족의 힘을 한데 모아온 ‘민족의 표현기관’이었음을 말해준다. 이제 동아일보는 한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해 온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향해 지구상 온 인류가 함께 어울리며 추구해 나갈 새로운 문화의 표상을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가 끊임없이 부딪치고 갈등하는 가운데 살고 있다. 문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굳어지는 고정불변의 관념이 아니다. 동아일보의 문화주의는 시공간적 제약을 넘어서는 역동성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