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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 실종된 방위비 협상… “11월 美대선까지 지켜보자” 주장도[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4-24 03:00:00

미궁에 빠진 韓美 방위비 협상




한미가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협상 타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서 한미동맹이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사진은 코로나19로 인해 예정됐던 한미 연합훈련이 연기됐다는 결정이 난 뒤인 2월 말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의 모습. 평택=뉴시스

한기재 기자

“그들(한국)이 특정 금액을 제시했지만 내가 이를 거부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일(현지 시간)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협상이 도무지 진전을 보지 못하는 이유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뒤이은 부연설명은 익숙한 논리였다. “한국이 (미국이 지불하는) 보호 비용의 더 큰 부분을 부담해야 한다고 요청 중이다. 현재 상태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

반년 넘게 이어진 협상 끝에 한미 실무진 간 잠정합의안이 3월 말 가까스로 도출된 것으로 알려졌던 터였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밝혔듯 이는 그만의 독특한 ‘계산적 동맹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좌초되고 말았다. 협상 난항의 핵심 원인이 협상 상대 최고위급의 강경한 태도라는 점이 확인되면서 향후 협상 전망 역시 어두워졌다.

올해 한국의 방위비분담금 총액을 결정짓는 제11차 SMA 협상이 시작된 지 어느덧 7개월. 사상 초유의 한국인 군무원 무급휴직 사태가 1일부터 발생한 지도 거의 한 달이 돼 간다. 한미동맹이 깊은 내상을 입고 있다는 우려가 계속 제기되는 가운데 최악의 경우 올해 내 타결이 어려울 수 있다는 전망도 본격적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 3월 31일, 그날 백악관에선 무슨 일이

지난달 말 우리 정부 당국은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지난해에 비해 13% 인상된 약 1조2000억 원을 올해 분담금 총액으로 두자는 제의를 미국에 건네 놓은 상태였는데 긍정적인 반응이 들려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난달 중순 한미 협상팀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나 회의를 개최한 직후만 해도 꼬인 매듭이 풀려간다는 징후는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협의가 끝난 지난달 19일과 31일 사이 급격한 기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정은보 방위비분담협상대사는 지난달 31일 공개 영상 브리핑에서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조만간 최종 타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당시 급진전을 이루게 된 배경은 이랬다. 장관급을 아우르는 한미 실무진이 당장 이달 1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던 한국인 군무원 무급휴직을 막아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전 세계가 시름하는 상황에서 불필요한 동맹 간 소모전을 피해야 한다는 교감을 나눴다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다소 성급한 ‘낙관적 사고’였지만 한국이 미국의 기류를 완전히 오독했던 것도 아니었다. 지난달 11일 로이터통신은 익명의 소식통들을 인용해 미국 내 기류를 설명하며 “한국의 (13% 인상) 제의는 미국의 기대치에 못 미쳤지만 한미가 코로나19 대응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그 정도 제의면 됐다(good enough)’고 볼 수도 있었다”고 전했다. 초유의 국제적 위기 속 극적 반전 가능성이 생겨났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달 31일 정 대사의 ‘조만간 타결’ 발언으로 정점에 달한 정부의 기대치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국 시간으로 31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났고, 그 직후 다소 낙관적이던 정부 당국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간밤에 전해진 듯 “상당한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메시지는 바로 다음 날인 1일 “지금은 드릴 말씀이 전혀 없다”로 바뀌었다. 정 대사도 이후 언론에 공개적인 메시지를 내지 않고 있다.

○ ‘1년 5조 원’과 ‘5년 5조 원+알파’의 괴리

앞서 한미 실무진이 공감대를 형성했던 ‘13% 인상안’엔 트럼프 대통령의 구미를 당길 만한 요소가 분명 담겨 있었다. 올해 분담금 총액은 1조2000억 원 선에 그치지만 협정 유효기간이 5년이라고 전제했을 때 향후 한국이 지불해야 하는 분담금 총액만큼은 5조 원을 훌쩍 넘기게 된다. 인상폭을 어떤 방식으로 계산하느냐에 따라 총 지불액은 약 8조 원에 달할 수도 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은 ‘1년에 50억 달러(약 6조 원)’를 협상 요구액으로 강조해왔으나 13%도 전례 없는 수준의 인상폭인 것이 분명해 미국 내에서 정치적 활용도가 결코 낮다고 보기 어렵다.

한국 입장에서도 선방했다고 볼만한 여지가 충분한 안이었다. 상식 밖의 터무니없는 총액 인상만큼은 막고 △한국인 군무원 인건비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로 구성된 기존 SMA 협정의 ‘틀’을 지켰다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이 이면에서 미국산 무기 등을 큰 규모로 구매하겠다고 제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에 대해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위원장은 22일 외교부 당국자들과 비공개 간담회를 가진 뒤 “(외교부는) 이면계약은 절대 없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러나 로이터통신이 미국 내 소식통들을 인용한 보도에서 ‘미국의 기대치에 못 미치는(underwhelming) 안’이라고 평가했듯 이 잠정합의안은 ‘1년에 50억 달러’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고집을 무마시키는 데는 끝내 실패했다. 협상 진행 도중 미국이 1년 총액 요구안을 39억 달러까지 낮췄다는 분석도 나온 바 있는데, 13% 인상안은 이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숫자다. 이런 까닭에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인데 한국이 백악관 최고위층의 기류를 고려하지 않고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뜨렸다가 미국의 불만을 샀다는 관측마저 나왔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결국 양국 최정상급에서 지혜를 짜내 방위비를 둘러싼 감정싸움을 방불케 하는 한미 간 소모전을 속히 끝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외교가에선 나오고 있다. 한국인 근로자 무급휴직으로 인한 실질적 갈등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어 정부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전국 9개 미군기지 앞에선 무급휴직자의 1인 시위 및 노숙집회가 진행 중이다. 무급휴직이 장기화되면 한국 정부의 정치적 부담이 커질 뿐만 아니라, 대북 대비태세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상황이다. 주한미군 한국인 근로자 관계자는 “무급휴직으로 인력이 4분의 1까지 줄어든 부서도 있어 무급휴직 대상이 아닌 근로자들도 높아진 업무 강도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고도 전했다.

○ 협상 동력 실종에 ‘美 대선 관망’ 카드마저 부상

외교당국은 협상 시작과 함께 중대 분기점이 될 시점들을 각별히 챙겨왔다. 지난해 12월 31일, 올 2월 말, 그리고 4월 1일이다. 이 날짜들은 각각 ‘지난 협정 유효기간 만료일’ ‘한국인 근로자 무급휴직 잠정통보 시점’, 그리고 ‘무급휴직 시작일’을 의미한다. “이때까지는 협상을 끝내보자”라며 내부적인 목표 시점으로 설정한 날짜들이지만 이제 전부 과거형이 돼버렸다.

협상에 정통한 외교소식통은 “한국과 미국이 이 같은 협상 시간표를 공유해 왔는데 이를 모두 넘겨버렸다”며 “실무선에선 이 시점을 넘긴 협상 계획을 꾸리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윤상현 위원장이 22일 “지금 당장 (정부 당국이) 나서서 협상을 할 이유는 없다고 한다”고 말한 배경엔 이 같은 ‘시간표 부재’의 문제도 있는 것이다.

양국 모두 양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다가오는 미국 대선과 여당이 압승을 거둔 한국 총선 결과로 인해 강 대 강 대치 국면이 더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수석부차관보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을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의 시범 케이스로 삼으려 하고, 한국 국회는 트럼프 대통령의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며 “협상 진전이 더 힘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환경이 워낙 녹록지 않다 보니 한국이 11월 미 대선 결과를 도박하는 심정으로 기다려 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극단적 견해마저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보다는 상대적으로 동맹 관계에 ‘상식적인 행보’를 보여 왔고,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당선 여부에 기대를 걸어보는 편이 낫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바이든 전 부통령은 “한국 등 아시아 민주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강화하겠다”며 ‘국제 파트너십 재건’을 대선 외교·안보 공약으로 내세웠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이달 초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민주당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트럼프 요구는) 지나쳤다’고 할 가능성이 있다”며 “한국 입장에선 미국 대선이 끝난 이후까지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같은 매체에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정책 조정관도 “미 행정부 교체가 일어난다면 (방위비 협상에 대해) 상당히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외교당국은 “미국 대선과 관련해 코멘트 할 것이 없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다만 이례적으로 장기화되고 있는 이번 협상의 특징을 감안한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편이다.
 
한기재 기자 recor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