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영 기자의 젊은 글쟁이를 만나다]
서울 광진구의 카페호이에서 만난 김동식 씨. 옛 직장과 멀지 않은 곳에서 그는 10년 넘게 살아왔다. 별다른 취미가 없어 퇴근한 뒤 이야기를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게 즐거움이었던 이 청년은 이제 여덟 권의 소설집을 쌓아올린 작가가 됐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김동식 씨(35)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면서 웃었다. 새 소설집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를 내면서 만난 자리다.
‘일주일…’는 김 씨의 여덟 번째 책이다. 첫 책을 낸 건 2017년 12월. 원고지 20~30매 분량의 이야기를 그간 600여 편 써왔다. 엄청난 생산량이다. ‘일주일…’의 표제작은 MBC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 웨이브가 공동 제작하는 드라마로 옮겨지기로 결정됐다. 최근 배우 신은수 이다윗이 주연으로 캐스팅됐다는 소식도 나온 터다.
김동식 씨의 새 소설집 ‘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 최근 영상화가 확정됐다.
지구 멸망 일주일 전, 초능력, 해피엔드. 이건 김동식 씨의 삶과 닮았다. 멸망까진 아니었지만 30대에 들어서기까지의 그는 ‘내일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매일 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주물공장에서 일하면서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겠다는 결심은 그때껏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일주일…’의 남자주인공 김남우(‘남자주인공’을 줄인 이름이다)가 자신도 몰랐던 초능력을 뒤늦게 발견한 것처럼, 김동식 씨가 ‘글쓰기 능력’을 발견한 건 공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지나서였다. 오전9시에 출근해 오후6시에 퇴근할 때까지 종일 기계만 돌리는 일을 하다가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인터넷 ‘오늘의 유머’ 게시판에 올린 게 계기였다. 결과는? 첫 책 ‘회색인간’이 21쇄를 찍은 것을 비롯해 그간 낸 소설집들이 13만 부 넘게 나갔다. 해피 엔드다.
세기가 바뀌었다지만 글쓰기 수업을 받는 과정을 거치고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과해야 소설가가 되는 과정은 여전히 견고한 쪽이다. 그가 자신을 ‘아무 작가’라고 한 건 이런 제도의 바깥에서 출발했을 뿐 아니라 단 한 번도 작가의 꿈을 꿔본 적이 없던 삶이었기에 그러하다. “살면서 꿈이 없었어요.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살아가는 이유가 없었습니다.” 어렸을 적 잠깐 가졌던 꿈이라곤 ‘오락실 사장’이 전부였다고, 사장이 되면 좋아하는 오락을 돈 안 내고 실컷 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다고, 그마저도 먹고 사는 일에 치이면서 금세 잊었다고 했다.
부산 영도구의 산동네에서 자란 그가 중학교를 채 마치지 않고 직업에 나선 건 잘 알려진 일이다. 딱히 싸움꾼도 아니었고 큰 사고를 친 것도 아니었다. 튀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고 정말 오락실 게임을 잘하는 아이였다. “동네에선 적수가 없어서 시내로 원정도 나갈 정도였어요. 앉은 자리에서 72승한 적도 있고요. 종일 게임을 하는데 밥 생각도 안 나요. 상대만 계속 바뀌고.” 굳었던 표정이 풀리고 웃음이 돌았다. 학교에선 숙제도 제대로 안 해온다고 혼만 나는 학생에겐, 가난해서 100원만 넣어도 잘만 하면 종일 할 수 있는 오락실이 탈출구였다. 김 씨는 언제부턴가 학교를 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만뒀다.
친척의 소개로 2006년부터 일하게 된 서울 성수동의 주물공장도 ‘의자에 앉아서 하는 일이라’ 어렵지 않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했다. “참아야 할 건 열기였거든요.” 500도가 넘는 액체 아연을 국자로 떠서 단추나 지퍼, 옷핀 모양 틀에 붓는 일이었다. 에어컨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지나면 그 바람도 아무 소용없을 만큼 더웠다. 그래도 몸은 덜 고단했고 공장 동료들도 선해서 그는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다.
그때껏 읽은 책이 열 권도 안 되던 청년이 이야기를 지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게 된 것은 반복되는 공장 일에 지쳤을 무렵이었다. 인터넷으로 게임을 즐기던 청년은 자주 방문하던 게임 공략 사이트에서 공포물 이야기를 올려놓은 게시판에 들어가게 됐고, 그 이야기에 달린 댓글들도 읽게 됐다. 그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접해본 ‘글’이었다. 나도 한번 써볼까,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취미도 없어 일 마치고 집에 와선 인터넷으로 웹툰과 애니메이션, 드라마 등을 자주 봐온지라 ‘이야기’가 어떻게 구성되는 건지는 얼추 익힌 터였다. 포털 사이트에서 ‘글 잘쓰는 법’을 검색했고 올라온 노하우를 따라 짧은 소설을 한 편 지었다. 핸드폰에 깔려 있던 ‘오늘의 유머’ 애플리케이션을 눌러 그 이야기를 업로드했다.
‘재미있어요’
그 첫 댓글을 봤던 순간을 김 씨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댓글에 힘입어 그는 다음 소설을 써나갔다. 사나흘에 한 편씩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1시간 물이 되었다 깨어나면 평생 느껴보지 못한 상쾌함을 느끼게 되는 정화수, 노동력이 없는 노인들을 가상 지구로 이주시켜 버리는 디지털 고려장, 건물 아래 사람들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식인 빌딩…. 댓글도 이어졌다. 누리꾼들은 김 씨를 창작자라고, 작가라고 불렀다. 그 자신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소통이 긴밀히다는 게 인터넷 글쓰기의 장점이다. 작가가 된 것은 내가 노력했다기보다는 인터넷 독자들이 당겨주고 만들어준 것”이라고 말하는 김동식 씨. 동아일보 DB
스스로 책은 재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악의’를 읽고는 “내가 착각했다”고 느꼈다는 그이다. ‘글 쓰는 게 재미있고, 재미있는 글을 쓰는 게 목적’이라는 김 씨에게 ‘글의 힘’이 무엇일지 물었다. 그는 “제가 여러 콘텐츠를 겪어보니 글이 대단히 불친절한 콘텐츠”라면서 “읽으면서 이해를 해야 하고 머릿속으로 그려야 하고…품이 들어가야 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런데 이해하는 데 오는 재미가 있더라”고 그는 말했다. “사람들이 공장에서 무거운 걸 드는 건 힘들어해도 헬스장 가서는 일부러 힘들게 무거운 걸 들잖아요. 불친절한 글을 일부러 읽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정신의 헬스클럽이랄까요(웃음).”
①처음부터 잘 쓰려고 하지 말라=“너무 잘 쓰려고 하면 작은 비판에도 의기소침해질 수 있습니다. 내가 프로가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내놓으면 비판을 받아도 아프지 않아요. 처음엔 못 쓰는 게 당연합니다. 저 역시 아무 기대 없이 시작했어요.”
②결말까지 그려놓고 쓰는 게 좋다=“결말을 정하지 않으면 글을 쓰다가 길을 잃게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선 처음부터 끝까지 뼈대만 씁니다. 일단 이야기를 다 풀어놔요. 결말까지 한 번 써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상세하게 살을 붙여가는 거죠.”
③글 쓰다 막힐 때는 몸을 움직이라=“글을 쓰다 막혔을 때 키보드를 붙잡고 있으면 힘은 힘대로 들고 진도는 안 나가고 힘들더라고요. 저는 그럴 때는 일어나서 집 안을 돌아다닙니다. 많은 작가들이 그런 경우 산책을 추천하던데 저는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안 좋아해서요(웃음). 안 풀린다고 앉아서 스마트폰 하는 건 도움이 안 돼요!”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