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된 현실 부정하며 TV 뉴스 끊고 식사 못 하고 잠 못 들어 ●분노를 넘어 심한 자책감, 폭음으로 일상생활 지장받기도 ●결과에 집착 말고 세대교체 수용 후 취미나 운동으로 관심 돌려야
21대 총선에서 종로구에 출마한 황교안 미래통합당 후보가 4월 8일 서울 종로구 옥인길 골목에서 시민과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대학 교직원으로 35년간 근무하다 3년 전 퇴직한 정모(65·경기 안산시) 씨의 말이다. 그는 21대 총선 날인 4월 15일 저녁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을 합해 153~178석, 미래통합당(통합당)과 미래한국당을 합해 107~131석. 명백한 보수의 패배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개표 방송을 지켜봤지만, 갈수록 보수 참패로 기울자 밤 11시 무렵 TV를 끄고 잠을 청했다. 그 후 정씨는 저녁 뉴스시간에도 TV를 켜지 않는다. 그는 “총선 후 속이 불편해 아침밥을 못 먹는다는 친구도 있다”며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무제로 피해를 본 기업과 지인들이 특히 나라 걱정을 많이 한다”고 전했다.
자영업자 고모(65·경기 안양시) 씨의 목소리에도 깊은 한숨이 배어 있었다. 그는 “요즘 잠이 통 안 온다. 나라가 망하는 것 아닌가 싶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꽁보리밥도 못 먹으면서 허리띠 졸라매고 자식들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정작 자식세대는 민주당에 표를 주니 정말 속상하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이들의 ‘수적 우위’는 통하지 않았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은 통합당, 18세부터 40대까지는 민주당 지지가 뚜렷한 가운데 50대가 민주당에 힘을 실어주면서 여당이 승리했다. 이제 한국 사회 주류는 60대 이상 ‘산업세대’에서 586으로 대표되는 ‘민주세대’로 변했다. 이번 총선이 아니더라도 60대 이상 유권자가 비주류로 밀려날 가능성이 컸다.
그렇지만 투표함을 연 이후 60대 이상 보수 지지자의 상실감과 걱정은 깊어졌다. 경기 평택시에서 주택관리사로 일하는 이모(61) 씨는 “나라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자주 멍한 상태로 있게 된다”고 했다. 조모(60·경기 성남시) 씨는 “경제 실책, 대북 문제, 청와대의 울산시장선거 개입 등등 문재인 정부는 정상적인 정부라 하기 어려울 정도인데도 이렇게 많은 국민이 민주당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실망이 크다”고 말했다.
미래 걱정에 ‘분노’, 식사 거르고 불면증
21대 총선 날인 4월 15일 오전 강원 화천군 화천문화예술회관에 마련된 화천읍 제2투표소에서 유권자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뉴시스]
민주당이 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상황에서 이들 세대가 가장 크게 우려하는 점은 ‘한국의 사회주의화’다. 이씨는 “지금도 우리는 북한과 이념전쟁을 치르는 중인데, 종북(從北) 정권인 민주당이 국회까지 장악했으니 큰일이다. 위기의식을 갖지 않으면 북한에게 먹힐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산 해운대구 주민인 문모(78) 씨는 “나라가 개판됐다 아이가”라면서 “6·25전쟁이나 궁핍한 시절을 겪어보지 못하고 개인주의적 성향만 강한 젊은이들이 국가 장래를 생각지 않고 투표한다”며 못마땅해했다.
‘사회주의화’에 대한 걱정은 경제, 복지, 안보, 대북 이슈를 모두 관통한다. 경기 이천시에서 자영업을 하는 최모(62) 씨는 “무상복지는 국민을 사회주의 체제로 길들이는 것”이라며 “자원도 없는 나라에서 긴급재난지원금 등으로 국고를 축내다가는 베네수엘라보다 더 망가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세 때부터 회사원으로 일해온 박모(60·경북 포항시) 씨는 “한국은 유럽 국가처럼 복지를 우선하기보다 경제발전을 더 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총선 결과가 더욱 걱정”이라고 말했다.
“사전투표도 못 믿겠다”
4월 22일 국회에서 인천범시민단체연합이 인천 연수을의 사전투표 조작 의혹을 제기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뉴시스]
4·15 총선 결과에 대한 실망과 분노는 현실 부정과 ‘음모론’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최모(61·경기 김포시) 씨는 “정권심판을 위해 정치에 관심 없는 아내를 설득해 함께 투표장에 갔다. 내 주변에는 여권에 비판적인 사람밖에 없다. 도저히 결과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평택시에 사는 이씨는 “이번 선거는 부정선거가 100% 확실하다. 중국인들이 개입했을 공산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천시의 최씨는 “사전투표를 못 믿겠다. 사전투표를 없애고 당일 투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총선이 장기간에 걸친 ‘공작’의 결과라는 얘기도 나온다. 이천시의 최씨는 “해방 후 남한에 남아 있던 좌익들이 교육계, 검찰, 경찰 등 사회 곳곳에 침투해 의식화 작업을 진행해왔다. 그 대표적인 단체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라고 힘줘 말했다. 가정주부 권모(67·서울 중구) 씨 또한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해 50대 이하의 사고방식이 우리 세대와 완전히 달라졌다”고 성토했다.
보수 정치권도 이들의 ‘화병 지수’를 끌어올리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보인다. 특히 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에 대한 실망이 크다. 김포에 사는 최씨는 “황교안이 깨끗한 사람일지는 몰라도 카리스마가 부족해 정치할 감은 아니다”라며 “차라리 이회창을 다시 데려오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심리학자, 정신건강 전문의 등 전문가들은 보수 지지층의 ‘총선 후유증’이 자칫하면 우울증 또는 불안장애로 진전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강은호 뉴욕정신건강의학과의원 대표원장은 “정치적 사건으로 인한 분노와 폭음 등 화병 의심 증세가 2주 이상 지속돼 일상생활에 지장을 느낄 정도라면 병원을 찾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강 원장은 “화병이나 우울증, 분노조절장애는 촉발 원인이 다를 수 있지만 식욕 부진과 수면 장애 등 증상은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며 “질병으로 진단받기 전 예방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덧붙였다. 임우영 건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도 “우울증은 내외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한다. 이번 총선 참패에 대한 분노 감정도 경우에 따라 우울증으로 심화될 수 있다. 총선이 끝나고 2주가 지나도록 같은 생각에 계속 매달리면서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현실 인정’이 가장 힘든 과제
김정호 덕성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어렵더라도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삶에서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다. 하지만 그것에 몰두하면 계속 반추가 일어나면서 특정 생각에 갇혀 삶이 불행해진다”며 “외부 사회는 어떻게 할 수 없더라도 자기 마음은 다스릴 수 있으니, 너무 바깥 사회만 보지 말고 자기 마음을 객관화하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우울증 예방 대책과 관련해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화가 나겠지만, 화만 내서는 젊은 세대의 이해를 구할 수 없다”며 “??‘우리 세대가 옳다’는 아집을 내려놓고 남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보는 태도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 원장은 “현실을 수용한 후 개인 관심을 총선 결과 대신 취미나 운동으로 돌려 생활 리듬을 되찾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문영훈 기자 yhmoon93@donga.com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36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