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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비가 오면, 별수 없다[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0-04-27 03:00:00

〈14〉파리와 에도의 풍경




펠릭스 발로통 ‘소나기’ 1894년.

19세기 프랑스 작가 발자크는 “도시는 끝없이 행진할 뿐 결코 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시도 갑자기 쉬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소나기가 쏟아지면 사람들은 하던 일과 가던 길을 멈추고, 비를 피하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진다. 펠릭스 발로통(1865∼1925)의 1894년 작 석판화 ‘소나기(L‘Averse)’는 갑작스러운 비를 만난 대도시 파리 시민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파리의 대도시화는 19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에 대략 50만∼60만 명에 그치던 파리 인구는 1831년에 78만여 명, 그리고 1846년에는 마침내 100만 명에 이른다. 그중 지주, 부르주아, 고위공무원 등으로 이루어진 5%의 상류층이 부의 75.8%를 차지했고, 육체노동자로 이루어진 76%의 하류층이 부의 0.6%를 소유했다. 그 사이에 소상공인, 수공업 노동자 등으로 이루어진 중간층이 있었다. 이 계급들은 업무 때문에 만날지언정 서로 어울려 살지는 않았다. 예컨대, 파리의 북동부 지역에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살고, 서부에는 부르주아들이 살았다.

이처럼 19세기 파리는 계급적으로 성층화된 대도시였건만, 소나기가 몰아치는 저 순간만은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19세기 파리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 무엇이든 소나기라는 갑작스러운 사태를 맞아 다들 공평하게 황망한 모습이다. 비를 피해야 하는 처지는 ‘실크햇’을 쓴 신사나 아이나 마부나 여인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소나기를 만나 일순간이나마 모두 평등해지는 순간은 동양의 그림에도 있다. 원래 속했던 화파인 가노(狩野)파를 뛰쳐나와 자기 유파를 만들고, 쇼군의 첩을 풍자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던 에도시대 화가 하나부사 잇초(英一蝶·1652∼1724). 그가 18세기 전반에 그린 그림 ‘비를 피함(雨宿圖屛風)’의 한 장면을 보라.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갑자기 거세게 몰아치는 비를 피하기 위해 대저택 처마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하나부사 잇초 ‘비를 피함’ 18세기.

에도(江戶·옛 도쿄)의 대도시화는 파리의 경우보다 훨씬 이른 18세기 초에 이미 완성되었다. 18세기에 이미 인구 100만 이상에 달했으니, 에도는 명실공히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일본의 이러한 도시화는 16세기 후반 이래 전국적으로 진행된 병농(兵農) 분리의 결과였다. 당시 일본 엘리트층인 사무라이가 도시에서 거주하게 된 현상을 일러, 미토(水戶)번의 학자 아이자와 야스시(會澤安·1782∼1863)는 ‘신론(新論)’에서 원래 사무라이는 다 농촌에 거주했으나 전국시대의 동란 이후 농촌을 떠나서 토착 무사가 없어진 것이야말로 큰 변화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 점은 상대적으로 도시가 미발달하고, 상당수가 지방에서 거주한 조선 양반의 모습과 대조를 이룬다.

18세기 에도 인구는 대략 사무라이 가족 60만, 상공인 가족 50만, 사찰 관련 인구 10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파리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거주지역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일본의 신분제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강고했고, 1870년 신정부가 신분제 철폐를 공포할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조차도 신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 다수의 견해이다.

이처럼 신분 간 구분이 강고했던 에도시대 일본에서도 비가 갑자기 몰아치면 별수 없다. 다들 황망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점에서 하나부사 잇초의 비를 피함은 정치적인 풍경이다. 그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모양새 자체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들이 평소에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처지라는 데 있다. 이들이 이렇게 모이고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나기라는 일시적인 위기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다. 마치 예상하지 못했던 감염병이 창궐하면 사람들이 갑자기 평소보다 단결하는 것처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