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파리와 에도의 풍경
펠릭스 발로통 ‘소나기’ 1894년.
파리의 대도시화는 19세기에 와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에 대략 50만∼60만 명에 그치던 파리 인구는 1831년에 78만여 명, 그리고 1846년에는 마침내 100만 명에 이른다. 그중 지주, 부르주아, 고위공무원 등으로 이루어진 5%의 상류층이 부의 75.8%를 차지했고, 육체노동자로 이루어진 76%의 하류층이 부의 0.6%를 소유했다. 그 사이에 소상공인, 수공업 노동자 등으로 이루어진 중간층이 있었다. 이 계급들은 업무 때문에 만날지언정 서로 어울려 살지는 않았다. 예컨대, 파리의 북동부 지역에는 저소득 노동자들이 살고, 서부에는 부르주아들이 살았다.
이처럼 19세기 파리는 계급적으로 성층화된 대도시였건만, 소나기가 몰아치는 저 순간만은 모두가 평등해 보인다. 19세기 파리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이 무엇이든 소나기라는 갑작스러운 사태를 맞아 다들 공평하게 황망한 모습이다. 비를 피해야 하는 처지는 ‘실크햇’을 쓴 신사나 아이나 마부나 여인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하나부사 잇초 ‘비를 피함’ 18세기.
18세기 에도 인구는 대략 사무라이 가족 60만, 상공인 가족 50만, 사찰 관련 인구 10만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파리와 마찬가지로 이들의 거주지역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일본의 신분제는 동아시아 어느 나라보다 강고했고, 1870년 신정부가 신분제 철폐를 공포할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조차도 신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 학자들 다수의 견해이다.
이처럼 신분 간 구분이 강고했던 에도시대 일본에서도 비가 갑자기 몰아치면 별수 없다. 다들 황망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 점에서 하나부사 잇초의 비를 피함은 정치적인 풍경이다. 그들이 이렇게 모여 있는 모양새 자체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들이 평소에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처지라는 데 있다. 이들이 이렇게 모이고 단결할 수 있었던 것은 소나기라는 일시적인 위기에 의해 비로소 가능했다. 마치 예상하지 못했던 감염병이 창궐하면 사람들이 갑자기 평소보다 단결하는 것처럼.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