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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인 인도, 16년간 5건만 불허… 정치범 아니면 대부분 보내[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0-04-27 03:00:00

‘손정우 사건’으로 본 범죄인 인도




김예지 사회부 기자

세계 최대 아동 성 착취물 유포 사이트 ‘웰컴투비디오’를 운영한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복역 중인 손정우(24)가 27일 밤 12시로 복역 기간을 다 채운다.

하지만 손정우는 곧바로 귀가할 수 없다. 미국 법무부가 손정우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고, 한국 법무부가 인도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손정우는 아동 성 착취물 게재 공모와 실행 등 9개 혐의로 미국에서도 기소된 상태다. 서울고검은 곧 손정우에 대한 인도 심사를 서울고법에 청구할 예정이다. 검찰은 만기 복역 후에 열릴 법원의 인도 심사에 대비해 손정우에 대한 인도 구속영장을 발부받은 상태다.

지난달에는 일명 ‘마약 여왕’ ‘아이리스’ 등으로 불리며 미국에 불법 체류한 40대 한국인 여성이 국내로 송환됐다. 앞서 한국 법무부는 미 정부에 이 여성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청구했다. 이 여성은 미국에서 모바일 메신저로 주문받은 마약을 한국에 팔아왔다.

○ ‘상호주의 원칙’ 범죄인 인도 조약 30년

한국 법무부가 미국에 있던 ‘마약 여왕’을 국내로 송환하고, 미 법무부가 손정우의 신병을 넘겨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건 두 나라가 1998년 6월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0년 9월에 호주와 가장 먼저 범죄인 인도 조약을 체결해 올해로 30년이 됐다. 한국이 이 조약을 맺고 있는 나라는 일본, 중국, 프랑스 등 80개국이다. 이 중 35개 나라는 양자 간에 조약을 맺었고, 나머지 45개국은 ‘범죄인 인도에 관한 유럽협약’에 따른 다자 조약이다.

범죄인 인도 조약은 상호주의가 원칙이다. 조약을 맺은 국가들은 몇 명의 범죄인을 상대국에 넘겨주고 몇 명을 넘겨받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범죄인 1명을 넘겨줬으면 다음번에는 우리도 1명을 넘겨받을 수 있다’는 기대가 유지돼야 한다는 상호주의가 기본 원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국제전략협력실 팀장은 “범죄인 인도 조약에는 호혜평등의 원칙이 숨어 있다. 한 나라가 1명을 인도해 주면 상대국도 1명을 인도해 주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상호주의는 ‘범죄인 인도법’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나라가 범죄인 인도를 청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는 해당국이 나중에 한국 정부가 범죄인 인도를 청구할 경우 이에 응하겠다는 보증을 하면 ‘범죄인 인도법’을 적용할 수 있게 돼 있다. 현행법상 범죄인 인도는 사형, 무기징역, 무기금고, 장기 1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해당하는 범죄 혐의자에 대해서만 청구할 수 있다. 범죄인 인도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인도하기 전까지는 범죄인을 넘겨주는 나라가, 이후 항공료 등 송환에 드는 비용은 범죄인을 넘겨받은 나라가 부담하도록 돼 있다.

○ 한국 법원, 최근 16년간 5건 인도 거절

대법원에 따르면 한국 법원이 범죄인 인도 심사 청구 결정문을 전산화한 2004년부터 지난해까지 16년간 모두 55건의 인도 심사가 있었다. 이 가운데 법원이 인도를 거절한 경우는 5건뿐이다. 인도를 거절한 5건 중 3건은 같은 사건에 대한 공범들인 점을 감안하면 인도가 불허된 건 사실상 3건에 불과하다.

이처럼 법원이 대부분의 청구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인도 심사는 국가가 형벌권을 행사하기 위한 형사재판이 아니라 신병 인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절차의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범죄인 인도법에 명시된 ‘인도 거절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대부분의 인도 청구는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법원이 인도를 허가한 결정문을 보면 “인도 심사는 범죄인의 유무죄를 엄격한 증명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제출된 소명 자료에 따라 인도 청구국에서의 소추나 재판 등을 위한 청구국으로의 인도가 정당한지를 판단하는 재판”이라고 돼 있다. 인도가 청구된 범죄인이 청구국 관할 내에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볼 만한 개연성만 있어도 인도를 허가하는 것이다.

범죄인 인도가 거부되는 대표적인 사례는 정치적인 성격을 지닌 범죄일 경우다. 한국 법원은 2006년 베트남 정부가 송환을 요청한 응우옌흐우짜인 씨의 인도를 허락해 주지 않았다. 베트남 정부는 응우옌흐우짜인 씨가 폭탄 테러 사건의 배후라며 인도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 사건은 폭발물 테러라는 일반 범죄와 베트남 정치 질서에 반대하는 정치 범죄가 결합된 것”이라며 “정치적 성격을 지닌 범죄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신병 인도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베트남 공산화에 반대한 응우옌흐우짜인 씨는 미국에 ‘자유민주주의 베트남 정부’를 세우고 내각 수반을 지낸 인물이다.

2013년 1월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불을 지른 중국인 류창 씨에 대한 일본 정부의 인도 청구를 한국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정치범 인도 불가’ 원칙을 따른 것이다. 당시 서울고법은 “류창의 범행은 일반 방화 범죄의 성격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서 비롯된 정치적 범죄의 성격이 강하다”며 “류창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기는 것은 대한민국 정치 질서와 헌법 이념뿐 아니라 대다수 문명국가의 보편적 가치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인도를 불허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정치적인 사건이라도 국가 원수, 정부 수반, 그 가족의 생명 또는 신체를 침해하거나 위협한 범죄는 인도 거절 사유에서 제외된다. 여러 사람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범죄인 인도법은 인도를 거절할 수 있는 경우로 △정치적 성격의 사건과 함께 △절대적 사유 △임의적 사유 등 3가지로 나눠놓고 있다. 절대적 사유는 해당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끝났거나 한국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경우 등이다. 임의적 인도 거절은 범죄인이 한국 국민인 경우나 범죄인이 처한 사정 등을 감안할 때 신병을 청구국에 넘기는 것이 비인도적(非人道的)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등이다.

상대국이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고 해서 법무부가 이를 모두 법원에 심사 청구하는 것은 아니다. 2014∼2018년 한국 정부에 청구된 범죄인 인도는 39건이지만 같은 기간 법원의 인도 심사는 12건이었다.

○ 한국의 범죄인 인도 결정은 단심제

‘마약 여왕’으로 불리던 40대 여성이 한국으로 송환된 건 지난달 30일이다. 한국 법무부는 이 여성에 대해 2016년 7월 인도를 청구했고 미국 법원은 2019년 3월 이를 허가했다. ‘마약 여왕’은 법원의 인도 결정이 내려지고도 1년이나 더 지나 한국으로 송환된 것이다. 이 여성이 법원에 인신보호를 청원해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미국 법원이 인신보호 청원을 기각하고 나서야 한국에서 호송팀이 건너가 이 여성을 데려올 수 있었다. 인신보호 청원은 법원의 범죄인 인도 결정 자체에 대한 불복 절차는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구속이 정당한지에 대한 심판을 청구해 청구국으로의 송환을 막거나 송환되더라도 시간을 늦추는 것이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진범 아서 존 패터슨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데려오기까지 4년의 시간이 걸린 것 역시 패터슨이 인신보호 청원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2011년 패터슨에 대한 인도를 청구해 미국 법원의 허락을 받았지만 패터슨은 2015년 9월에야 한국으로 송환됐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장녀 유섬나 씨는 프랑스 법원의 송환 결정에 항소해 한국으로의 송환이 2년 넘게 늦춰졌다.

한국에는 이런 인신보호 청구 절차가 없다. 또 법원의 결정에 불복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범죄인 인도 심사는 사실상 단심제인 셈이다. 대법원은 2001년 강모 씨가 제기한 범죄인 인도 허가 결정에 대한 재항고 사건에서 “인도를 허락한 법원의 결정에 불복할 수 없다”고 밝혔다. 강 씨는 한국이 미국과 맺은 조약에 따라 미국에 넘겨준 첫 번째 범죄인이다. 강 씨는 한인 범죄 조직을 만들어 강도, 강간 등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미국에서 구속됐다가 27억여 원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뒤 한국으로 도망쳐 왔다. 미국은 강 씨에 대한 궐석재판에서 징역 271년을 선고하고 강 씨에 대한 송환을 요청했다. 서울고법이 인도를 허가하자 강 씨는 이에 불복해 재항고를 했는데 대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 대법원은 “범죄인에 대한 인도 허가 결정은 국가형벌권의 확정을 목적으로 하는 형사소송법상의 결정이 아니다”라며 “범죄인 인도법에 의해 특별히 인정된 것이기 때문에 불복을 위한 신청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했다. 강 씨는 2003년 “범죄인 인도 결정에 불복할 수 없게 한 것은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이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예지 사회부 기자 ye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