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0주년 기획/동아일보 100년 문화주의 100년]
<7·끝> 학술과 문장의 바다
동아일보에 학술 논문을 연재한 학자와 기자들. 왼쪽부터 정인보, 최현배, 동아일보DB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부터 학술 연구를 신문 지면 위로 끌어냈다. 학예면이 그대로 학술 활동의 무대가 됐다. 이는 아카데미아의 영역이 저널리즘을 기반으로 새롭게 펼쳐지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민족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면서 ‘국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이 확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1920년대 신문 지면에서 만나게 되는 최현배의 ‘조선 민족 갱생의 도(道)’(1926년)와 최남선의 ‘단군론’(1926년)은 당대 최고 수준의 학술 논문으로 손꼽힌다. 일본 교토제국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던 최현배는 귀국과 함께 ‘조선 민족 갱생의 도’를 들고 동아일보의 독자와 만났다. 그가 민족에 대해 지닌 뜻은 식민지 상황에서는 그 실천이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는 철저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정신사적 대전환을 요구했다. 이 글에 담긴 학자적 신념의 철저함과 이상의 원대함은 지금도 감동적이다. 이 논문을 발표한 후 그는 민족 교육의 기초가 되는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중학시절 주시경의 문하에서 배웠던 말과 글에 대한 지식을 살려 한글학자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최남선은 ‘단군론’을 발표하면서부터 학자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당대 한국 고대사 연구의 성과로 평가되는 이 논문은 촉탁기자였던 최남선이 무려 석 달 가까이 연재했다. 일본 학자들의 단군 부정(否定)을 통박하기 위해 그는 문헌학적 접근과 민속학 연구 방법을 접합시켜 고증과 논리적 전개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단군을 중심으로 한국 민족사의 기원을 새롭게 규명함으로써 민족의 표상으로 단군의 존재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동아일보는 한국 고전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정인보는 ‘조선고전해제’(1931년)를 연재해 조선 후기의 정제두, 이광사, 홍대용 등의 저작을 소개했고, 특히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을 집중 조명했다. ‘실학’이라는 용어도 이러한 작업을 통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정인보가 연재한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1933년)은 한국 전통사상의 근대적 변화에 한 단초를 제공했던 양명학의 본질을 밝히고자 한 노력의 산물이다. 양주동이 연재한 ‘고가요의 어학적 연구’(1939년), ‘여요(麗謠) 석주(釋注)’(1940년)는 한국문학 연구에서 문헌학적 연구의 기반을 확립한 대표적 업적이다. 중국의 문헌과 함께 국내 고문헌을 섭렵한 이 연구는 고전 시가 연구의 출발점이 됐다.
1926년 8월 11일자 설의식의 단평 ‘헐려 짓는 광화문’. 동아일보DB
경성제국대 출신의 신예 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한국 문화 연구도 지면에 그대로 소개했다. 한국 문학 연구에서 분류사 또는 장르사 연구의 출발을 보여주는 김태준의 ‘조선소설사’(1930년)와 김재철의 ‘조선연극사’(1931년)가 바로 그것이다. 김태준의 소설사 연구는 한국 민중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 소설 양식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체계화하고 있다. 소설의 역사를 사회 계급적 갈등의 현실을 토대로 성립, 발전한 것으로 기술하는 데 있어 그가 이루어낸 관점과 방법은 여전히 유효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재철의 연극사 연구도 한낱 광대놀음 정도로 천시됐던 전통 연희에 연극의 개념을 부여하고 본질적 속성을 새롭게 규명한 작업으로 유명하다.
광복 이후 전문적 학술연구는 대학으로 활동무대를 옮겼지만 김병익 기자가 1973년 연재한 ‘문단 반세기’(뒤에 ‘한국문단사’로 제목 변경)는 방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개인적 경험이나 회고를 바탕으로 문단의 뒷이야기를 다루던 것과는 달리 이 연재는 문학 활동의 기반이 되는 문단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회문화사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29년 7월 18일자 현진건의 기행 산문 ‘고도순례―경주’. 동아일보DB
동아일보는 기자의 현지 탐방을 그린 기행 산문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여행기의 형식으로 장소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젊은 기자의 기백과 열정이 흘러넘치는 민태원의 연재 ‘백두산행’(1921년)이 그 시초 격이다. 백두산에 이르기까지의 멀고 험한 답사 가운데서도 ‘천지’의 장엄한 광경을 그려낸 대목이 백미다. 만연체의 긴 호흡을 살려내면서 고조된 감흥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활용한 대조 기법이 문장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글의 감동은 뒤에 최남선의 ‘백두산 근참(覲參)’(1926년)으로 이어졌다.
고도(古都)를 돌아보는 여러 편의 글로 독자들에게 민족의 역사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설의식의 ‘홍조(鴻爪)’는 ‘기러기의 발자국’이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역사의 무상함을 암시하며 백제의 옛 도읍이었던 부여와 황산 일대를 돌아보는 감회가 새롭다. 이 글은 이병기가 쓴 ‘사비성(泗沘城)을 찾는 길에’(1928년)와 함께 읽어보면 그 역사적 배경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부여의 퇴락한 모습을 돌아보는 심정이 부소산과 낙화암의 정경에 그대로 실리지만 백마강은 말없이 흘러간다. 지나간 역사의 흔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안타까움이 더욱 짙게 독자들에게 전달된다.
사회부 기자였던 현진건의 ‘고도순례(古都巡禮)―경주’(1929년)는 신라 천년의 화려했던 역사를 경주의 고적을 중심으로 지면 위로 살려냈다. 불국사의 아름다운 정경과 석굴암의 빼어난 예술적 감각 등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 글은 유적의 순례가 얼마나 깊은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은상의 ‘금강행(金剛行)’(1930년)을 통해 독자들을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금강산으로 안내한다. 정인보가 연재했던 ‘남유기신(南遊寄信)’은 얼핏 호남 지역의 풍물 기행처럼 보이지만 각 지역의 이름 있는 학자들을 통해 전통 유학의 호남 학맥을 자연스럽게 소개한다.
동아일보는 단평을 지면 위에 정착시키기도 했다. 일찌감치 칼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지령 100호를 즈음해 1920년 7월 25일자부터 시작된 ‘횡설수설(橫說竪說)’은 ‘휴지통’과 아울러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첫 회부터 “인쇄기에서 떨어지는 신문지를 산더미같이 실어서 경찰서로 잡아간다”고 언론의 자유가 유린당하는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분량은 길지 않지만 일침(一針)의 효과를 얻기 위해 재치와 독설이 함께 부딪쳤다.
1973년 ‘문단 반세기’를 연재한 김병익 기자. 동아일보DB
오랜 기간 ‘횡설수설’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설의식은 동아일보가 낳은 시대의 저널리스트다. 설의식의 단평 ‘헐려 짓는 광화문’(1926년) 또한 지금 읽어도 가슴을 친다.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이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총독부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광화문이 헐리는) 망치소리가 북악에 부딪힌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白衣人)의 가슴에도 부딪힌다.” 간명하고 직절(直截)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설의식의 ‘유관순 추념사’를 달달 외웠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읽었던 ‘문장보감’이라는 낡은 책에 수록된 글로, 단번에 전문을 암기했다. “성은 유(柳)요 이름은 관순(寬順)이니 이 나라의 딸이다”로 시작돼 “짜른 일생을 나라에 바친 한 떨기의 무궁화! 사나운 된서리에 피지도 못하였던 봉오리는 이제 자유에 느꺼운 삼천만개의 가슴에서 피어날 것이다”에 이르면 가슴이 벅찼던 생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런 문장의 연금술사가 기자로서 동아일보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독자 모두에게도 행복이다. 동아일보 100년의 역사는 이렇게 거대한 문장의 바다를 이룬다.
권영민 서울대 명예교수·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