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6000억 원 피해에도 역대급 도피 생활 ‘어마 무시한’ 정-관계 로비 실체 밝혀야
정원수 사회부장
모자 제조사의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브랜드 이름은 그리스 여신들이 몸에 지니고 다녔던 삼지창 모양의 무기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부적처럼 쓰고 다니던 ‘삼지창 모자’에도 불구하고 김 전 회장의 도피 행각은 최근 중단됐다. 그와 함께 숨어있던 라임 이종필 전 부사장(42), 신한금융투자 심문섭 전 팀장(39)까지 이른바 라임 사태 3인방이 동시에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체포 과정은 첩보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했다. 무엇보다 라임 사태 전반을 6개월 이상 추적한 검찰이 아닌 경찰이 이들을 ‘일망타진’한 것부터가 반전이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은 수원여객 횡령 사건으로 김 전 회장의 오른팔로 불린 A 씨를 구속 수감했는데, 김 전 회장의 또 다른 측근 B 씨가 A 씨의 경찰 진술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A 씨 가족에게 접근한 것이다. 김 전 회장은 19일 B 씨와 서울 신촌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고, 뒤늦게 이를 파악한 경찰은 주변 폐쇄회로(CC)TV 등을 모조리 추적해 김 전 회장이 서울 성북구로 이동한 것을 알게 됐다.
라임은 사모펀드로 업종을 바꾼 지 3년 만에 자산 규모 5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헤지펀드 회사로 급성장했다. 이번에 붙잡힌 3명은 각각 라임의 전주, 설계자, 판매자로 역할을 나눈 주연급이다. 이들 외에도 서울 명동과 강남의 사채업자, 개미투자자를 울린 전문 기업사냥꾼, 연예기획사 대표 등 주연급 조연이 많다. 법조계에선 ‘1, 2년 정도 수사해야 할 정도’ ‘형사부 검사 4, 5명으로 수사할 수 없는, 예전 같으면 반부패수사부 2, 3곳이 투입될 사안’이라는 지적이 나오지만 아직 수사팀의 확대 개편 소식은 없다.
김 전 회장은 사업을 할 때 메시지 전달 과정 전체를 암호화하는 와츠앱,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를 통해 주요 인사들과 비밀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로비를 어마 무시하게 하는 회장님’으로 불린 김 전 회장의 로비 대상에는 분명히 정·관계 인사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 파견 행정관을 지낸 금융감독원 팀장급 간부 외엔 아직 드러난 게 없다. 김 전 회장의 행보를 알면 알수록 평범한 월급쟁이와 소상공인의 상대적 박탈감만 커질 것이다. 수사기관은 1조6000억 원대 투자 피해의 배후를 반드시 밝혀야 한다.
정원수 사회부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