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위기 극복 위한 돈 풀리자 잡음 커져 ‘얼마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
박용 뉴욕 특파원
편지를 읽던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겉봉투 발신인은 텍사스주 오스틴 국세청, 편지 본문 상단 발신기관은 ‘백악관’이었다. 편지 끝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서명도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 등 대통령이 자주 쓰던 표현도 보였다. 황 씨는 “카드 대금 납부 등을 위해 요긴하게 돈을 썼다”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게 용돈을 받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황 씨처럼 통장으로 입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수표가 배달됐다. 이 수표도 논란에 휩싸였다. 정부 발행 수표에 들어가는 재무장관 서명 대신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 이름을 넣느라 수표 발송이 늦어졌다는 보도까지 등장했다. 야당 민주당은 “11월 대선을 앞둔 선거운동”이라며 발끈했다.
미 행정부와 의회는 현금을 마련할 길이 막막한 중소기업 등을 위해 자금을 풀었다. 하지만 막대한 기금을 보유한 하버드대 등 명문대부터 증시에 기업공개까지 한 햄버거체인 ‘쉐이크쉑’ 등 자금줄이 탄탄한 이들이 먼저 목돈을 받아 갔다. 누굴 위한 지원이냐는 비난이 커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이들이 받아 간 돈을 회수하고 자격 요건과 단속을 강화했다.
코로나19 위기로 실직한 사람들에게 넉 달간 주당 600달러씩 추가 실업급여를 지급하기로 했더니 직장을 다닐 때보다 실업급여로 더 많은 돈을 받는 이들까지 생겼다. CNN 등은 경제 활동 재개를 앞둔 일부 주에선 넉넉한 실업급여와 직장 복귀를 놓고 노동자들이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아이오와, 오클라호마 주지사들은 직장에 복귀하지 않는 노동자의 실업급여를 박탈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당장 일손이 부족한 사장님들은 ‘위기 이전보다 웃돈을 얹어주고 사람을 구해야 하느냐’며 난감한 기색이다.
나라 곳간을 열고 빚을 내 돈을 풀 때 생색을 내는 건 정부나 정치권이지만 이 돈을 갚을 사람은 일반 국민과 미래 세대다. ‘행정부의 무능’과 ‘정치권의 야심’에 오염돼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랏돈이 가지 않는다면 미래 세대에 고통을 분담해 달라고 설득할 명분도 희박해질 것이다.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지난달 15일 “미국의 현금 지급 정책을 아시아가 따라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미국은 국제통화 달러를 갖고 있지만 아시아 국가는 그렇지 않다”며 현금 지급은 모든 사람에게 나눠 주는 것보다 취약 계층을 보호하기 위해 써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는 이 말도 덧붙이고 싶었을지 모른다. ‘달러를 찍어내는 미국조차 연소득 9만9000달러 이하로 현금 지급 대상을 제한했다’고. 언제 끝날지 모를 위기를 극복하려면 돈을 얼마나 푸느냐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하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