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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판에 서서, 긴 호흡으로[내가 만난 名문장]

입력 | 2020-05-04 03:00:00


이효근 백암정신병원 진료원장

가끔 수면 위에서 따뜻한 햇살을 바라보는 건 좋지만 고래가 살아야 할 곳은 물속이듯, 결국 고고학자의 가장 큰 즐거움은 혼자 외롭게 유물을 바라보는 중에서 피어나야 한다.
 
―강인욱 ‘고고학 여행’ 중

누구나 타인의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어떤 직업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한다. 고고학자인 저자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를 떠올리며 모험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라는 사람들로 때론 난감하다고 한다.

우리는 고고학자라 하면 투탕카멘의 미라나 신라의 금관을 발견하는 순간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그들 삶에서 찰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고고학자의 실제 일상은 광대한 유적의 벌판에서 돌과 흙을 헤쳐 가며 애쓰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긴 시간은 단지 그 하루를 위한 인고의 세월일까. 아닐 것이다. 유물을 찾은 단 하루가 아닌 그 하루까지 가는 긴 세월 자체가 고고학자의 삶이자 기쁨일 것이다.

나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나의 삶도 어쩌면 고고학자의 삶과 조금 닮지 않았나 생각했다. 넓은 벌판에 호미 하나 들고 선 고고학자처럼, 정신과 의사 역시 환자가 펼쳐놓는 광대한 사연의 벌판에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작은 단서를 찾으려 한다. 고고학자가 유적에 삽을 대자마자 유물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듯, 정신과에서도 한 번에 발견되는 극적인 솔루션은 없다. 긴 시간, 때로는 좌절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이 정신과 치료다.

그래서일까. 저자가 말하는 “혼자 외롭게 유물을 바라보는 중에서 피어나는 즐거움”이란 것의 의미를 조금 알 것도 같다. 사람들은 정신과와 정신병원의 드라마틱한 사연에 호기심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보람은 어떤 스포트라이트도 없는 그 긴 동행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이효근 백암정신병원 진료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