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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악기도 사람 목구멍서 나오는 소리는 못따라가”

입력 | 2020-05-05 03:00:00

부임 1년 맞아 신작 창극 ‘춘향’ 내놓는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은 “소리 할 때는 긴장이 덜 되는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이렇게 떨린다”며 촬영에 앞서 판소리 한 대목을 뽑았다. 그는 대극장에서도 객석 제일 뒤편까지 꽂히는 맑은 소리를 지녔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사람 목구멍 소리만 한 게 없거든요.”

소리, 소리, 소리….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60)이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소리’다. 깊고 맛있는 소리에 대한 갈증이 밖으로 배어나온 탓일까. 연습실에선 매일같이 단원들에게 “탁탁, 소리 끊는 맛이 없다”며 지적하고, 연출가와 음악감독에게는 “소리의 맛을 절대 잃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한다. 창극에서 극(劇)보다 창(唱)에 방점을 두겠다는 것. 그런 그가 예술감독 부임 약 1년 만에 신작 ‘춘향’으로 ‘귀 명창’ 관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직접 작창을 맡아 섬세한 소리를 엮어냈다.

지난달 29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만난 유 감독은 “아무리 좋은 악기 소리나 연주라도 사람의 목구멍 악기에서 나오는 감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창극의 연극·음악적 요소를 잠시 뒤로 놓고, 소리를 좀 더 보여 드릴 것”이라고 했다.

33년간 국립창극단원으로 숱하게 무대에 오르면서도 소리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전임 김성녀 예술감독이 창극의 외연을 넓혔다면 그는 “소리꾼의 숨소리까지 집중하게 만드는 작품”을 원했다. 그런 그의 눈에 판소리 다섯 바탕의 꽃인 ‘춘향가’가 들어왔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다채로운 변용이 가능한 데다 수준 높은 소리를 선보일 수 있기 때문.

“왁자지껄하고 경쾌한 서곡으로 시작하는 이전의 ‘춘향’과 달리 이번에는 방에서 춘향이가 단장하는 정적인 장면으로 시작해요. 김명곤 연출가와 협업해 고전에 기초하되 극, 캐릭터, 음악을 변주했어요. 오늘날 젊은이들의 밝고 건강한 사랑 이야기를 들려 드릴 겁니다.”

그가 짠 소리는 기교가 다양한 만정제 ‘춘향가’를 중심으로 했다. 동초제·보성소리에서 장면에 어울리는 선율을 가져왔으며 원작에 없는 장면은 김성국 음악감독이 작곡했다. 만남 사랑 이별 고난 희망으로 구성된 다섯 부분 중 이별에서부터 본격적인 소리의 맛을 살렸다.

당초 스승 안숙선 명창에게 작창을 의뢰했으나 “나한테만 의지하지 말고, 알아서 잘 짜서 해보라”는 조언에 얼떨결에 직접 맡았다. 그는 “작창을 해보니 제가 단원 시절 선생님들이 답답해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며 웃었다.

춘향과 개인적 인연도 깊다. 유 감독은 만정 김소희 명창의 대표 제자이자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이수자다. ‘춘향’으로 당대 최고 여성 소리꾼의 명맥을 이어온 그는 1988년을 잊지 못한다.

“당시 신예였던 제가 올림픽 문화예술축전 ‘춘향전’ 무대에 벌벌 떨며 오른 기억이 있어요. 말도 안 되는 파격 캐스팅이었죠. 국립극장 70주년을 맞는 올해도 제가 예술감독으로 춘향과 만난 걸 보면 분명 인연이 있나 봅니다.”

지난해 공연한 창극 ‘심청가’에 출연한 유수정 예술감독. 스승 안숙선 명 창과 함께 도창(導唱)을 맡았다. 국립극장 제공

가야금 명인 유대봉 선생의 딸로 자랐지만 “악기는 손도 대지 말라”는 엄포 때문에 국악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그래도 피는 속이지 못했다. 영화인 줄 알고 우연히 극장에서 창극 ‘춘향전’을 본 17세 때의 어느 날. 그날 이후로 그는 귓가에 맴돌던 소리를 해야만 했다. 이젠 그를 보고 따르는 단원과 제자가 수두룩하다. 그가 스승들에게 배웠듯 그 역시 “자기가 가진 뿌리가 흔들려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예술감독 이전에 소리꾼인 그가 소리의 뿌리인 완창에 욕심을 내는 건 당연하다.

“내년 정도 슬슬 준비해야죠. 제 목이 옛날 같지 않지만 이유 불문하고 ‘무대에 서면 소리 참 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됐으면 합니다.”

14일부터 24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2만∼5만 원. 8세 관람가.

김기윤 기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