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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의 도발]보수는 진보로 ‘전향’했나

입력 | 2020-05-07 15:59:00


진보 동원은 필패. 야당의 전가의 보도였던 정권 심판론의 실효성이 상실되고 있는 상황. 정체성 확립이 혁신과 선거 승리의 요체…. ‘보수 동원은 필패’인데 ‘진보 동원’으로 잘못 쓴 게 아니다. 이건 5년 전 더미래연구소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승리를 위해 주최한 토론회에서 나왔던 얘기였다.


더미래연구소는 김기식, 조국 등 좌파 성향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2015년 출범시킨 싱크탱크다. 이 연구소의 국민정치지형 여론조사에서 스스로 진보라는 유권자가 31.9%, 보수가 44.8%나 됐다. 진보 유권자를 전부 동원해도 선거 패배라는 ‘기울어진 운동장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더미래연구소가 2015년 개최한 ‘집권전략보고서’ 발표 토론회. 출처 더미래연구소 


보수층은 거의 다 새누리당으로 결집하는데 진보층은 절반 정도만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결집한다는 한탄도 나왔다. 대안야당이 못 돼 정권 심판 아닌 야당 심판론이 나오는 거라며 새누리당을 배워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에고,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다.

● 망하는 정당은 언제나 비슷하다

결론은 그때도 못 내린 듯하다. “그래서 중도로 가야 한다”는 주장에 “우리가 진정 진보여서 패한 적이 있느냐”는 주장이 맞섰을 뿐이다. 진보를 보수로, 새누리당을 미래통합당으로, 새정련을 더불어민주당으로 바꾸면 지금 상황에도 거의 들어맞는 얘기다.

4·15총선 직후 사과인사를 하는 미래통합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지도부. 동아일보DB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는 결과를 알고 본다는 데 있다. 가까운 과거도 그렇다. 토론회가 열렸던 2015년 8월 넷째 주 새정련 지지율이 21%(갤럽·새누리당은 44%)였다. 진보 집권을 위한 잇단 토론회에도 불구하고 정당 운영도, 지지율도 달라지지 않다가 결국 10월 말 재보선에서 참패했다.

그 뒤 이 당이 어떻게 2016년 총선에서 승리했는지 우리는 안다. 문재인 대표가 사퇴하고,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들어와 ‘친노 정체성’을 세탁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미래통합당도 비슷한 길로 가는 것일까. 이번 총선 득표율로 보면, 보수 동원은 필패다. 통합당 지지율이 25%인데 득표율 41.5%니 찍을 사람은 전부 찍어줬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민주당보다 8%포인트 적을 뿐이라며 좀 더 동원하면 된다는 말들이 없지 않다. 심지어 통합당이 언제 진정한 보수였던 적이 있었느냐, 태극기와 함께 가열하게 나가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 돌아오지 않는 통합당 집토끼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과 정의당, 민생당, 민중당까지 포함한 진보진영에 표를 준 유권자가 53.8%다. 과거 보수층 일부가 진보로 돌아섰다는 의미다. 유권자의 이념 지형이 바뀌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아시아연구원(EAI)은 21대 총선을 심층 분석해 “4월 총선에서 과거 새누리당 지지층의 62.9%만 보수 지지층으로 복원됐다”고 최근 특별논평을 내놓았다.

한때 콘크리트 지지층이라고 불리던 박근혜 대통령 지지층, 그리고 굳이 박근혜를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보수층 10명 가운데 6명은 새누리당에서 돌아선 지 오래다. 언제부터?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과 박근혜 탄핵을 거치면서부터.

헌법재판소가 2017년 3월 박근혜 대통령 파면을 결정하자 환호하는 사람들. 동아일보DB 


이 점이 중요하다. 통합당이 공천도 못했고, 대안정당도 못 됐고, 막말을 쏟아냈고, 정부여당도 잘한 건 없지만 통합당은 그보다 더 못했기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했다고들 한다. 그렇다면 공천 잘하고, 대안 내놓고, 막말 안 하면 과거 지지층이 돌아올 수 있을까.


● 보수가 개종해 진보시대가 왔다?

새누리당 지지층이었던 이들 가운데 33.1%는 이제 보수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 17.9%는 민주당으로, 3.4%는 정의당으로 개종했다는 게 EAI 분석이다(나머지는 무당파). 주간지 시사인도 최근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과거 통합당 지지자 중 15%가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 지지로 전향했다는 거다. 이념 성향 자체가 민주당과 함께 움직인다며 진보가 다수인 시대가 왔다고 했다.

과연 보수가 진보로 전향한 것일까. 정치와 사회에 관심 많은 이들을 제외한 보통사람들은 스스로 진보니, 보수니 하지 않는 편이다. 보통, 중도, 상식적이라고 여긴다. 데일리안이 알앤써치에 의뢰해 총선 직후 실시한 조사에서도 자신이 진보라는 응답이 19.2%, 보수가 18%였다. 유권자의 거의 절반(47.1%)이 중도라는 얘기다.

이들 중도층이 보수와 가장 의견 차이가 큰 대목이 박근혜 탄핵이다. 보수의 46.5%가 박근혜 탄핵에 공감한다고 답한 반면, 중도는 75.5%, 진보는 94.3%가 공감하고 있다. 탄핵 직후 국민의 80%가 탄핵에 공감한 데서 달라지지 않았다. 통합당이 암만 ‘탄핵의 강을 건너자’는 원칙 아래 뭉쳤다 해도 보통 유권자에게 이 당은 반성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은, 그때 그 당인 것이다.


● 핵심은 박근혜 탄핵에 대한 태도다

8일 통합당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주호영, 권영세 두 후보자는 대대적 개혁 의지를 밝혔다. 실용적 리더십, 강경보수 아닌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협상꾼을 뽑는 게 아니라면, 보수층이 이탈한 요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들이 돌아올 명분을 줄 리더십을 지녀야 한다.

근로자의 날인 이달 1일 텅 비어 있는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회의실. 동아일보DB 


보수가 다시 집권해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지가 있다면, 통합당은 박근혜 탄핵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선자는 세상이 자기 것 같아서, 낙선자는 제 코가 석 자여서, 다른 상당수는 긁어 부스럼 만들 것 있냐며 뭉개려 해도 국민은 잊지 않았다.

내부 충돌이 불가피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것은 강력한 리더십일 수밖에 없다고 EAI는 지적했다. 새로 뽑힐 원내대표가 그런 리더십을 가졌기 바란다. 아니면 강력한 비상대책위원장을 모셔오든지. ‘오너’가 없어 비대위가 성공하기 어렵다고? 세금으로 지원해주는 국민이 통합당 오너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