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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플래시100]“日왕실 3종신기 우상숭배” 비판했더니 무기정간 조치

입력 | 2020-05-08 11:40:00

1920년 9월 25일





플래시백
얼마 전 인터넷 공간에서 기독교 제사문제 갈등이 다시 한 번 불거졌습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죽음과 삶’을 주제로 강연했는데 자연스럽게 기독교와 제사문제를 언급했고, 다른 출연자가 “나도 기독교인인데 어머니 제사를 지내고 절도 한다”고 하자 삽시간에 논쟁이 불붙은 겁니다. 이 해묵은 갈등은 100년 전 신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920년 9월 1일자 동아일보는 경북 영주에서 벌어진 비극을 전했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며느리가 시어머니 사후 조석상식(朝夕上食·아침저녁으로 고인에게 음식을 바침)을 계속했는데, 기독교 신자가 된 남편이 못하게 하자 “불효를 대신 갚겠다”며 극단적 선택을 한 겁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와 함께 당대의 지식인, 독립운동가로 기독교청년회(YMCA) 활동에 매진하던 월남 이상재의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를 사모하는 효성에서 나오는 것이니, 예수교의 불배우상(不拜偶像·우상에게 절하지 않음)과 상관없다’는 요지였죠.

기독교계에서 들고 일어났습니다. 개신교의 대부인 목사 양주삼이 ‘중요한 것은 부모 생전에 효로써 섬기는 것이지, 사후에 제사하는 게 아니다’라는 취지의 글을 동아일보에 보냈습니다. 그러자 유학계 원로, 운양 김윤식이 나서 기독교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양주삼이 재차 기고하면서 지상(紙上)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동아일보는 몇 차례의 사설을 통해 제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의 해결책을 찾으려 했습니다. 9월 10일자 사설은 돌아가신 조상을 마음으로 기리며 정성을 다하는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니지만, 지나친 허례허식과 형식에 흘러 본래의 정신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논평했습니다. 같은 달 24, 25일자 연속 사설 ‘제사문제를 재론하노라’에서는 나무와 흙으로 형상을 만들고 치장해 모시는 것은 물론, 신이나 영혼을 물질적으로 대하는 것도 우상숭배라고 한 뒤 사회적 교화제도로서의 제사의 본뜻은 슬픔과 공경을 다하는 것이라고 명쾌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세 차례 사설을 모두 집필한 장덕수 주간은 단지 제사문제를 논의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최고 권력인 왕실을 통쾌하게 비판했습니다. 바로 25일자 사설 가운데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기타 어떤 모양으로든 형태를 만들어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 역시 우상숭배’라는 대목입니다. 거울과 굽은 구슬(曲玉), 검(劍)은 천조대신으로부터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왔다는 일본왕실의 상징, 삼종신기(三種神器)입니다. 지난해 나루히토 일왕 계승 때도 화제가 됐었죠. 그런데 이를 정면으로 우상이라고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9월 10일자 사설 ‘제사와 우상숭배’에는 ‘야만 인종들이 공포와 미신으로 고목에도 절하고, 거석에도 절해 복을 구하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일본왕실이 삼종신기를 떠받드는 것을 우상숭배라고 규정한 것은 결국 우리의 강토를 빼앗고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일제를 야만적이라고 꾸짖은 겁니다.

총독부는 당장 이날 동아일보를 발매금지(압수)하고, 같은 날 신문지법 21조에 따라 총독 명의로 발행정지(정간) 명령을 내렸습니다. 같은 해 4월 1일 창간사에서 ‘본사의 전도가 심히 험하도다. 그의 운명을 누가 가히 예측하리오’라고 민족지의 가시밭길을 예견했지만, 불과 지령(紙齡) 176호 만에 기약 없는 정간을 맞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무기정간이 비단 삼종신기 비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총독부의 발행정지 이유서는 동아일보가 그 동안 다른 나라의 예를 들고 반어(反語), 음어(陰語)를 사용해 제국주의를 교묘하게 비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고 반역심을 자극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격투기에 비유하자면 독립을 염원하는 강펀치를 수없이 얻어맞아 혼미해진 일제에 삼종신기 비판으로 결정타를 날린 셈입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원문


祭祀(제사) 問題(문제)를 再論(재론)하노라 (二·이)
祖先(조선) 紀念(기념)과 偶像崇拜(우상숭배)의 別(별)


禮(예)를 制定(제정)한 本意(본의)와 禮(예)의 大本(대본)을 擧(거)하야써 吾人(오인)은 임의 社會制度(사회제도)로서의 祭祀(제사)의 位置(위치)를 論(논)하얏거니와 이제 祭祀(제사) 그 自體(자체)에 對(대)하야 內容(내용)을 觀察(관찰)할진대 그 第一(제일) 問題(문제)되는 바는 祭祀(제사)의 本意(본의)가 那邊(나변)에 在(재)한가 함이니 곳 그 本意(본의) 祖先(조선)을 紀念(기념)함에 在(재)한가 或(혹)은 祖先(조선)의 魂靈(혼령)이 降臨(강림)하야 이를 崇拜(숭배)함에 在(재)한가 함이로다.

吾人(오인)은 此(차)를 論判(논판)하기 前(전)에 爲先(위선) 偶像崇拜(우상숭배)란 무엇인가를 明白(명백)히 할 必要(필요)가 잇다 하노니 大槪(대개) 이에 對(대)한 明確(명확)한 知識(지식)이 無(무)하면 또한 祖先(조선) 紀念(기념)과의 分別(분별)을 明白(명백)히 하지 못할 것이로다.

偶像崇拜(우상숭배)의 第一(제일) 顯著(현저)한 者(자)는 木彫泥塑(목조이소)하고 粉面金身(분면금신)하야 神(신)이 玆(자)에 在(재)하며 或(혹) 靈(영)이 玆(자)에 在(재)하다 하야 이를 崇拜(숭배)할 뿐 아니라 有時乎(유시호) 이에 對(대)하야 降祥降福(강상강복)을 祈禱(기도)함이니 이는 確實(확실)히 偶像崇拜(우상숭배)라 할 것이오. 設或(설혹) 人身(인신)을 模作(모작)한 偶像(우상)은 無(무)할 지라도 或(혹)은 鏡(경)으로, 或(혹)은 珠玉(주옥)으로, 或(혹)은 釰(인)으로 그 他(타) 何等(하등) 模樣(모양)으로든지 物形(물형)을 作(작)하야 或處(혹처)에 奉置(봉치)하고 神(신)이 玆(자)에 在(재)하며 或(혹) 靈(영)이 玆(자)에 在(재)하다 하야 이에 對(대)하야 崇拜(숭배)하며 或(혹) 祈禱(기도)함은 一切(일체) 偶像崇拜(우상숭배)라 할 것이니.

大槪(대개) 此(차) 理(리)는 知者(지자)를 待(대)하야 비로소 알 바 아니라 賢愚(현우)를 勿論(물론)하고 人(인)의 知覺(지각)을 具備(구비)한 者(자)는 반다시 廓然(확연)할지니 人手(인수)로 造作(조작)한 바 工(공)과 塑匠(소장)의 彰施(창시)한 바 色(색)이 엇지 神(신)을 接(접)할 수 잇스며 神(신)이 또한 엇지 이에 接(접)하리오. 神(신)은 神(신)이오, 物(물)이 아니며, 靈(영)은 또한 靈(영)이오, 物(물)이 아니라. 木(목)은 스사로 木(목)이오, 神(신)은 스사로 神(신)일지니 그 間(간)에 何等(하등) 關係(관계)가 存在(존재)하리오. 볼지어다, 偶像(우상)에 비록 耳目(이목)이 存在(존재)하나 그 엇지 能(능)히 見聞(견문)하며 또한 임의 心膓(심장)이 無(무)한지라 그 엇지 能(능)히 知覺(지각)할 수 잇스리오.

棟宇(동우)로써 蔽(폐)하지 아니하면 風霜(풍상)이 剝蝕(박식)하되 知(지)하지 못하며 勤(근)히 掃除(소제)하지 아니하면 烏鵲(오작)이 營巢(영소)하되 覺(각)하지 못하나니 이는 實(실)노 空空然(공공연)한 一片(일편) 木偶而己(목우이기)라 人(인)이오. 此(차)를 崇拜(숭배)함은 스사로 그 所作(소작)을 崇拜(숭배)함이니 設或(설혹) 神(신)이 잇다 할지라도 人(인)의 作(작)한 바 神(신)이 何等(하등)의 崇拜(숭배)할 價値(가치)가 有(유)하리오. 要(요)컨대 神(신)을 神(신)으로써 하지 아니하며 靈(영)을 靈(영)으로써 하지 아니하고 空虛(공허)한 木石(목석)과 그 他(타) 物形(물형)을 對(대)하야 崇拜(숭배)함은 곳 偶像崇拜(우상숭배)이니 이로써 보건대 神(신)을 待(대)함에 物質的(물질적)으로써 하고 靈(영)을 思(사)함에 物質的(물질적)으로써 함이 亦(역) 偶像崇拜(우상숭배)이라 할지로다.

萬有(만유)의 主宰(주재)이신 唯一神(유일신)이 엇지 禮拜堂(예배당)에 存在(존재)하리오. 그럼으로 昔時(석시)에 或(혹) 祭壇(제단)을 設(설)하야 이에 神在(신재)한다 함도 亦(역) 偶像崇拜(우상숭배)의 一(일)이오, 사람이 復活(부활)하면 天使(천사)와 갓흘지라 엇지 物質的(물질적) 家屋(가옥)을 要求(요구)하리오. 그럼으로 或(혹) 이 天國(천국)을 珊瑚柱(산호주)에 黃金(황금)집 갓치 생각함도 亦(역) 偶像崇拜(우상숭배)의 一(일)이로다. 神(신)은 唯一神(유일신)이오, 理(이)는 唯一理(유일 이)니 그럼으로 이를 崇拜(숭배)하는 者(자)는 맛당히 神靈(신령)으로써 하며 또 眞理(진리)로써 함이 可(가)하다. 그 間(간)에 엇지 雜神(잡신)을 各樣(각양)으로 崇拜(숭배)함을 容納(용납)할 수 잇스리오.

이졔 祭祀(제사)의 本意(본의) 무엇인고. 祭日(제일)을 當(당)하야 祖先(조선)의 魂靈(혼령)이 降臨(강림)하야 享祭(향제)함으로 이를 崇拜(숭배)함인가. 萬若(만약) 祭祀(제사)의 本意(본의) 그러하다 하면 吾人(오인)은 斷斷乎(단단호) 이를 排斥(배척)하야 마지아니하노니 이는 社會(사회) 敎化制度(교화제도)로서 何等(하등)의 益(익)이 無(무)할 뿐 아니라 오히려 民知(민지)를 啓發(계발)하며 民德(민덕)을 增進(증진)함에 害(해)가 될지라. 祖先(조선)의 魂靈(혼령)이 降臨(강림)하면 또한 上去(상거)할지니 上去(상거)하야는 何處(하처)에 在(재)하며 降臨(강림)하야는 何處(하처)에 留(유)하는고. 魂靈(혼령)이 엇지 바람갓치 이리저리 往來(왕래)하며 사람갓치 飮食(음식)을 要求(요구)하리오. 이는 靈(영)을 待(대)함에 物質的(물질적)으로써 함이니 元來(원래) 靈(영)은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을 超越(초월)하며 또한 物質的(물질적) 感覺(감각)이 無(무)한지라. 然則(연즉) 이는 偶像崇拜(우상숭배)임이 分明(분명)할 뿐 아니라 民衆(민중)의게 迷信(미신)을 擴大(확대)하며 그 間(간)에 自然(자연)히 求媚徼福(구미요복)하는 非禮(비례)가 生(생)할지니 이 엇지 世道(세도)人心(인심)에 益(익)할 바-며 吾人(오인)의 贊成(찬성)할 바-리오.

그러나 祭祀(제사)의 本意(본의)가 그러하지 아니하도다. 이는 吾人(오인)의 臆說(억설)로써 함이 안이라 그 禮(예)의 本(본)이 甚(심)히 아름다운 줄을 앎으로써 함이니 볼지어다, 孔子(공자)는 『雖疏食菜羹(수소식 채갱)이라도 必祭(필제)하사대 必齊如也(필제여야)』 하섯스니 이는 祖先(조선)에 대한 祭祀(제사)는 아니나 그러나 萬事(만사)에 그 本(본)을 忘(망)치 아니함은 하나이니 基督敎徒(기독교도)의 臨食(임식) 感謝祈禱(감사기도)와 그 所意(소의)는 殊異(수이)할지언뎡 그 所趣(소취)는 同然(동연)하며 또 孝(효)를 가라치실새 『生死之以禮(생사지이례)하며 死葬之以禮(사장지이례)하며 祭之以禮(제지이례)』니라 하섯스니 이는 人之事親(인지사친)의 始終(시종)이라. 生死(생사)를 通(통)하야 그 孝(효)를 다하게 함이니 孝心(효심)은 무엇인고. 곳 父母(부모)를 思慕(사모)하는 至誠(지성)이라. 이럼으로 生(생)하야 事(사)함에 그 誠(성)을 다하고 死(사)하야 葬(장)함에 그 誠(성)을 다하고 또 祭(제)함에 그 誠(성)을 다하나니 이는 換言(환언)하면 父母(부모)를 잇지 못하는 至情(지정)으로써 함이오, 반다시 그 魂靈(혼령)의 降臨(강림)을 因(인)하야 함이 아니라. 그럼으로 『霜露旣降(상로기강)이어든 君子履之(군자이지)하고 必有(필유) 凄愴之心(처창지심)하나니 非其寒之謂也(비기한지위야)라. 春(춘)에 雨露(우로)-旣濡(기유)어는 君子履之(군자이지)하고 必有(필유) 怵惕之心(출척지심)하야 如將見之(여장견지)』이니 이 四時祭(사시제)의 起源(기원)이라. 이로써 보건대 祭祀(제사)의 本意(본의)가 그 엇지 偶像崇拜(우상숭배)이오, 愼終追遠(신종추원)의 아름다운 情(정)이 아니리오.

이를 더욱 밝히 論證(논증)할진대 祭義(제의)에 하얏스되 致齊於內(치제어내)하고 致齊於外(치제어외)하야 齊之日(제지일)에 思其居處(사기거처)하며 思其笑語(사기소어)하며 思其志意(사기지의)하며 思其所樂(사기소락)하며 思其所嗜(사기소기)하야 齊三日(제삼일)에 乃見其所爲齊者(내견기소위제자)니라 하얏스니 이는 魂靈(혼령)의 降臨(강림)을 指(지)함이 아니라 그 齊(제)하는 바의 親(친)을 面對(면대)하야 보듯시 함을 意味(의미)함이오.

齊之日(제지일)에 入室(입실)하야 僾然必有見乎其位(애연필유견호기위)하며 周還出戶(주환출호)에 肅然必有聞乎其容聲(숙연필유문호기용성)하며 出戶而廳(출호이청)에 愾然必有聞乎其歎息之聲(개연필유문호기탄식지성)이니라 하얏스니 이는 魂靈(혼령)아 降臨(강림)하야 그곳에 在(재)함을 意味(의미)함이 아니라 祭如在(제여재)를 意味(의미)함이니.

이럼으로 先王(선왕)의 孝(효)는 『色不忘乎目(색불망호목)하며 聲不絶乎耳(성부절호이)하며 心志嗜慾(심지기욕)을 不忘乎心(불망호심)하시니 致愛則存(치애즉존)하고 致慤則著(치각즉저)라. 著存(저존)을 不忘乎心(불망호심)어니 未安得不敬乎(미안득불경호)리오』하얏도다. 이는 勿論(물론) 大孝(대효)의 至極(지극)한 情誠(정성)의 効果(효과)이려니와 如何間(여하간) 이로써 보건대 祭祀(제사)의 大本(대본)이 人情(인정)의 至美(지미)한 點(점)으로써 流露(유로)하야 民德(민덕)을 歸厚(귀후)하는 愼終追遠(신종추원)의 社會的(사회적) 敎化制度(교화제도)임이 分明(분명)하니 그 엇지 飮食(음식)으로 魂(혼)을 待接(대접)함이 祭祀(제사)의 本意(본의)며 따라 報本(보본)의 道(도)리오. 吾人(오인)은 오즉 그 至情(지정)의 아름다운 點(점)을 贊揚(찬양)코자 하노라. (未完·미완)



현대문

제사 문제를 다시 논하노라 (2)

조상을 기념하는 것과 우상 숭배의 구별


예절을 제정한 본뜻과 예절의 큰 근본을 들어 우리는 이미 사회제도로서의 제사의 위치를 논했다. 이제 제사 그 자체의 내용을 관찰하려 한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제사의 본뜻이 어디에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니 곧 그 본뜻이 조상을 기념하는 데 있는가, 아니면 조상의 혼령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와 이를 숭배하는 데 있는가 함이다.

이를 논의해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우선 우상숭배란 무엇인가를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대개 이에 대한 명확한 지식이 없으면 조상을 기념하는 것과 구별하는 것도 명백히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현저한 우상숭배는 나무를 깎거나 흙을 빚어 얼굴에 분을 바르고 몸엔 금칠을 해 신이 여기에 있다, 영혼이 여기에 존재한다며 이를 숭배할 뿐 아니라 어떤 때에는 이를 대해 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니, 이는 확실한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 설령 사람의 형태를 본떠 만든 우상은 없을지라도 혹은 거울로, 혹은 주옥으로, 혹은 칼로, 그밖에 어떤 모양으로든 물건의 형태를 만들어 어떤 곳에 받들어 모신 뒤 “신이 여기에 있다”, 혹은 “영혼이 여기에 있다”하며 이를 숭배하고 기도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

대체로 이런 이치는 배운 사람만이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명한 이, 어리석은 이 모두 가리지 않고 사람의 지각을 갖고 있는 자는 틀림없이 확연할 것이니 사람의 손으로 제작한 솜씨와 흙 빚는 장인이 만들어낸 모양이 어찌 신과 맞닿을 수 있으며, 신은 또한 어찌 이에 접할 수 있을 것인가. 신은 신이요, 물건이 아니며, 영혼은 또한 영혼이지 물건이 아니다. 나무는 나무일뿐이요, 신은 신일뿐이니 그 사이에 무슨 관계가 존재할 것인가. 보라. 비록 우상에 눈과 귀가 있지만 어찌 능히 보고 듣겠으며, 또 심장이 없는데 그 어찌 능히 알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마루와 추녀로 덮지 않으면 서릿바람이 벗겨내고 침식해도 알지 못하며, 부지런히 청소하지 않으면 까마귀, 까치가 집을 지어도 깨닫지 못하니 이(우상)는 실로 공공연히 한 조각 나무로 만든 사람의 형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를 숭배함은 스스로 만들어놓은 것을 숭배하는 것이니 설령 신이 있다 해도 사람이 만든 것이니 그 신이 하등 숭배할 가치가 있다 하겠는가. 요컨대 신을 신으로 대하지 않고, 영혼을 영혼으로 대하지 않고 공허한 목석, 기타 물건을 받들어 숭배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니 신을 대함에 있어 물질적으로 하고, 영혼을 생각함에 물질적으로 하는 것 역시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

우주 모든 것을 맡아 처리하시는 유일신이 어찌 예배당에 존재할 것인가. 그러므로 옛적에 제단을 설치해 여기에 신이 계신다 함도 역시 우상숭배의 하나다. 사람이 부활하면 천사와 같을 것인데 어찌 물질적인 가옥을 요구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하늘나라를 산호구슬에 황금으로 만든 집처럼 생각하는 것도 역시 우상숭배의 하나이다. 신은 유일신이요, 이치는 유일한 이치이니 이를 숭배하는 사람은 마땅히 신령으로, 또 진리로 하는 것이 옳다. 그 사이에 어찌 각양각색의 잡신을 숭배하는 것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이제 제사의 본뜻은 무엇인가를 보자. 제삿날을 맞아 조상의 혼령이 내려와 제사를 누리므로, 이를 숭배하자는 것인가. 만약 제사의 본뜻이 그렇다 하면 우리는 단호히 이를 배척한다. 이는 사회를 교화하는 제도로서 어떠한 이익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백성의 지식을 계발하고 덕을 증진하는 데 해가 되기 때문이다. 조상의 혼령이 강림하면 결국은 다시 위로 올라갈 것이니 올라가서는 어느 곳에 있으며, 내려와서는 어디에 머무는가. 혼령이 어찌 바람 같이 이리저리 왕래하며, 사람 같이 음식을 요구하겠는가. 이는 영혼을 물질적으로 대하는 것이니 원래 영혼은 시공을 초월하며, 또한 물질적 감각이 없는 것이다. 그런 즉 이는 우상숭배임이 분명할 뿐 아니라 민중에게 미신을 확대하는 것이며, 그러는 사이에 자연히 복을 구하는 비례(非禮)가 생길 수밖에없으니 이 어찌 세상의 인심에 유익하겠으며, 우리가 찬성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제사의 본뜻은 그렇지 않다. 이는 우리가 고집스럽게 우겨서가 아니라 그 예절(제사)의 근본이 심히 아름다운 줄 아는 것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보자.

공자는 ‘비록 거친 밥과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제를 올리되, 엄숙하고 공경하게 한다’고 하셨다. 이는 조상에 대한 제사는 아니지만 만사에 근본을 잊지 않음은 매한가지니 기독교도가 먹을 것 앞에서 드리는 감사기도와 그 뜻은 다를지언정 취지는 같은 것이다. 공자는 또 효(孝)를 가르치실 때 ‘(부모님)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예로써 하며, 사후 장례를 예로써 하며, 제사 역시 예로써 해야 한다’고 하셨으니 이는 부모님 섬기기의 처음과 끝이다.

부모님의 생사를 막론하고 효도를 다하게 하는 것이니 그렇다면 효심은 무엇인가. 곧 지성을 다해 부모를 사모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부모님을 섬기는 데 정성을 다하고,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를 때 정성을 다하고, 또 제사를 지낼 때 역시 정성을 다하는 것이니 이는 바꿔 말하면 부모를 잊지 못하는 지극정성으로 하는 것이요, 반드시 혼령이 속세로 내려와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을날 군자가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 반드시 서글픈 마음이 생길 터인데, 그것은 춥기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가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봄날 군자가 비와 이슬을 밟으면 반드시 놀랍고 슬픈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은 곧 돌아가신 부모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라 했으니 이는 철마다 지내는 시제의 기원이다. 이로써 보건대 제사의 본뜻이 그 어찌 우상숭배라 하겠는가. 그것은 곧 부모의 상과 조상의 제사에 예절을 갖춰 슬퍼하며 경건함을 유지하는 아름다운 정이 아니겠는가.

이를 더욱 명백히 논증해보겠다. ‘예기’의 ‘제의’ 편에 ‘안에서 부정한 일을 멀리하고 밖에서도 몸과 행동을 삼가 제를 지내는 날에는 그 분이 거처하시던 곳, 웃고 말씀하시던 모습, 그 분의 뜻, 즐거워했던 것, 취미로 즐겼던 것을 생각하며 재계하기를 사흘간 하면 곧 그 대상, 즉 부모를 보게 될 것이다’고 했으니 이는 혼령이 속세에 내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올리는 대상인 부모를 대면하여 보듯 함을 뜻하는 것이다.

‘제사 지내는 날 방에 들어가면 반드시 거기에 모신 분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며, 두루 돌아보고 방문을 나서면 반드시 숙연한 그 소리가 들리며, 밖으로 나와 들으면 반드시 안타깝게 탄식하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 했으니 이는 혼령이 내려와 그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받들 때는 부모가 바로 그 자리에 와있다는 마음으로 정성과 공경을 다하라는 뜻이다.

이런 까닭으로 ‘선왕의 효도는 눈에서 부모의 낯빛을 잊지 않으며, 귀에 부모의 음성이 끊이지 않으며, 부모의 마음과 뜻, 즐기던 것, 하고자하던 것을 마음에 잊지 않는 것이니 극진하게 사랑하면 곧 존재하고, 지극히 정성을 다하면 모습이 나타난다. 부모가 존재하고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마음으로 잊지 말아야 하니, 어찌 경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했다.
이는 물론 지극한 효도의 극진한 정성의 효과이겠지만, 어쨌든 이로써 볼 때 제사의 큰 근본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인정으로 발현돼 백성의 도리를 너그럽게 하는, 슬픔과 공경을 다해 상제(喪祭)를 행하는 사회적 교화제도임이 분명하니 그 어찌 음식으로 영혼을 대접하는 것이 제사의 본뜻이며,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는 길이겠는가. 우리는 오직 그 진심에서 우러나는 참된 정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자 한다. (미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