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땅은 벌거벗은 걸 좋아하지 않아. 잡초라도 덮여 있어야 해. 태양이나 비는 맨땅을 공격해서 흙 속에 사는 미생물들은 다 죽여. 그러면 땅이 딱딱해지고 사막화되어 버려. 호밀을 뿌리면 좋은 일이 생길 거야.” 레돔은 대체로 맞는 말을 하기 때문에 나는 반박할 수 없어 늘 부아가 난다. 쓸데없이 일이 많아질까 봐 걱정이다. 지난겨울 밭을 갈기 위해 빌려온 관리기는 너무 낡아서 자주 시동이 꺼졌고 언덕을 내려오면서 몇 번이나 뒤집어져 다칠 뻔했다. 돌이 많은 땅이라 날이 부서지고 나사가 풀리기도 했다. 몇 시간 흙을 파헤치며 작은 나사를 찾아 헤맸다. 6611m²(약 2000평)의 땅을 갈아 씨를 뿌리느라 고생했다.
그러나 겨울에 싹이 파릇파릇 올라올 때는 신기했다. 흰 눈 속에 초록은 더욱 빛이 났다. 이웃 복숭아 농부의 개가 어린 호밀 싹을 좋아해서 산책 갈 때면 이곳에 들러 호밀을 뜯어 먹었다. 개는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면서 어린 호밀 싹을 뜯었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라는 속담에 해당되지 않는 개였다. 산에서 내려온 노루와 토끼도 풀을 뜯고, 멧돼지도 호밀 싹을 훑어 먹었다. 밭은 아침마다 토끼 똥, 노루 똥, 개똥, 멧돼지 발자국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포도나무를 심고 나자 호밀은 더 바빠졌다. 아기를 돌보는 엄마처럼 포도나무 발치가 마르지 않도록 촉촉하게 감싸주었다. 뜨거운 뙤약볕이 내리쬐면 아빠의 밀짚모자처럼 그늘을 만들어 시원하게 숨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봄비가 한 번 더 내리자 호밀은 성큼 더 자라버려 문제가 생겼다. 태양을 가려 어린 나무가 자라지 못할 정도가 됐다. 호밀을 모두 베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호밀 전문가 레돔의 생각은 달랐다.
“베지 말고 포도나무 남쪽으로 난 호밀을 모두 밟아서 눕혀줘. 뒤쪽은 그냥 둬. 북쪽에서 부는 바람이 매서우니까 북풍을 막아줄 거야.” 나는 장화를 신고 포도나무 앞쪽에 심어진 호밀을 밟아 눕히기 시작했다. 사그락사그락 소리를 내면서 호밀이 바닥에 눕는다. 어느 프랑스 시인의 시구(詩句)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시몬, 너는 좋으냐 호밀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남쪽으로 난 호밀을 모두 눕히니 한쪽 길이 훤해졌다. 이제 어린 포도나무는 북풍을 가려주는 뒤쪽 호밀에 기대어 햇빛을 한껏 받으며 자랄 것이다. 농사가 힘들다고 하지만 호밀이 있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 게으른 농부도 자꾸 밭에 가고 싶어진다. 밟아서 눕힐 때 나는 소리도 좋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는 풍경은 마음을 설레게 한다. 호밀 싹을 먹고 자란 복숭아 농부의 개도 이 풍경을 보면 굉장히 듣기 좋은 소리로 멍멍 짖어댄다. 호밀 시를 읊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한 달 후면 호밀을 수확해야 할 것 같다. 내년에 뿌릴 씨앗을 남겨두고 호밀빵 두어 개 구워 먹을 정도라도 나오면 좋겠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