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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와 읽기의 홍수에서 살아남기[정도언의 마음의 지도]

입력 | 2020-05-13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

기반 시설이 정말 열악했던 수십 년 전, 장마철이면 큰길, 작은 길이 오물이 뒤섞인 흙탕물로 넘쳐 무릎까지 잠기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 길을 뚫고 걸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지금 그런 경험은 드뭅니다. 자연 재해와 달리 이제는 인간이 만들어 낸 말과 글의 홍수가 문제입니다. 신문,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기반으로 한 각종 새로운 미디어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글과 말이 우리의 시각과 청각을 계속 엄습하고 있습니다.

수돗물처럼 정화된 것들, 혼탁한 것들, 대충 걸러서 수돗물처럼 보이게만 한 것들이 섞여 있어 정말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신 차리고 잘 읽고 들으면 문제가 없을 것 같지만, 우리는 그런 능력이 부족하다고 봅니다. 이미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것들을 소화할 ‘정수 시설’과 안전하게 방출할 ‘하수도 시설’이 제대로 설치돼 있지 않습니다. 제 기억에는 비판적으로 읽고 듣는 방법을 교육받은 바가 거의 없습니다. 논리적 사고방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는 능력은 현대인의 생존에 거의 절대적입니다. 지난 세월에는 읽어야 할 것도, 들어야 할 것도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기껏해야 여유 있는 사람의 거실을 장식한 대백과사전 전집 정도가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상징이었습니다. 신문, 방송으로 전달되는 정보의 양도 적었습니다. 이제는 판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미세먼지가 현실이 되고 공기정화기 작동이 일상이 된 것처럼, 말과 글의 홍수에 대한 대처법도 필요합니다. 코로나19에 감염되지 않으려면 손을 자주 씻고, 마스크를 하고,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처럼 넘쳐나는 것들 속에서 마음의 건강을 지키려면 비슷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첫째, 읽고 듣는 일은 단순한 정보 획득이 아닙니다. 글을 쓴 사람이나 말을 한 사람과 나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글을 읽으면 동시에 글이 나를 읽습니다. 말을 들으면 동시에 말이 나를 듣습니다. 마음에 변화의 불꽃이 점화돼 결국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 남습니다. 들은 말과 읽은 글이 출발점이 돼 나만의 생각이 펼쳐져야 합니다. 글과 말이 내게 일방적인 영향을 주도록 허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인 글과 말을 부품으로 수입해서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완제품에는 내 삶의 의미를 심고 키워야 합니다.

둘째, 누구의 말이든, 누구의 글이든, 무조건 받아들이기보다는 그들이 놓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비판적 시각으로 듣고 읽어야 합니다. 영상의 경우는 비언어적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말투, 말실수, 몸짓에는 말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셋째, 글과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어떤 형식으로 표현되는지도 중요합니다. 인정하는 듯하면서, 현란한 표현으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면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상한 논리를 도입해 논란이 되는 일의 의미를 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용과 형식을 모두 보아야 합니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하고 어떤 맥락으로 글을 썼는지를 보면,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습니다.

넷째, ‘전문가’의 말이라고 무조건 진실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배경이 무엇인지, 누구와 평소 어울리며 지내는지 알면 판단에 도움이 됩니다. 개인적 동기를 숨기고 하는 논평일수록 교묘합니다. 지나치게 내세우는 균형감도 복면처럼 진실을 가립니다. 누구든지 사적인 경험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쓰거나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전문가’가 뱉어내는 ‘전문적 관점’은 견고할지 몰라도 개방성이 부족합니다. 특히 자기 성찰 없이 여기저기 나타나 글과 말을 남기는 경우라면 늘 하는 이야기가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 생각이 굳어진 전문가는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제대로 된 전문가는 자신이 굳게 믿어온 바도 때로는 잊고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딱딱한 ‘신념’과 ‘확신’은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부드러움을 가장한 폭력입니다.

다섯째, 글과 말에 속아 이용당한다면, 끝까지 모르든 중간에 알게 되든 모두 문제입니다. 합리적인 의심과 의문은 편집증이 아닌, 현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너무 얽혀 있어 판단이 어려울 때 기댈 곳은 상식입니다. 진실의 뿌리는 단순함입니다.

정체를 숨긴 오염된 마음과 거리를 두고, 내 마음을 보호하며 살기 위한 무기는 읽기와 듣기를 꾸준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읽고 듣되 글과 말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비판적 사고와 사고의 확장으로 나만의 것을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현대의 ‘식민주의자’는 총과 칼이 아닌, 글과 말로 우리의 마음을 침식해 지배 영역을 넓히고 있습니다. 일례로 가짜 뉴스와 선동이 이미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늘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정도언 정신분석가·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