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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의 미래, 더 신중해야 한다[오늘과 내일/신연수]

입력 | 2020-05-14 03:00:00

한국의 얼굴인 수도 서울의 지도를
5년 단임정부가 함부로 바꾸지 말라




신연수 논설위원

젊은 시절, 미국 워싱턴DC를 처음 가보고 충격을 받았다. 링컨기념관과 정부 건물들,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국회의사당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도시 설계에 놀라 “역시 미국은 대국이구나” 감탄했다. 문화와 예술, 상업이 역동적 혼을 뿜어내는 뉴욕에 처음 가서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세계 여러 도시를 가본 터라 비교적 무뎌졌지만 어디든 도시의 첫인상은 오래 남는다.

워싱턴DC가 인공적으로 조성된 도시라면 서울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역사적 도시다. 경복궁과 창덕궁, 북촌을 빼고 서울을 상상하기 힘들다. 이들은 서울의 품격을 한 차원 높여주는 보석 같은 존재들이다. 그럼에도 서울이 1%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특색 없는 빌딩과 아파트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멋지게 설계한 한양을 물려줬는데 현대에 들어 너무 방치한 것은 아닐까.

최근 국토교통부가 ‘수도권 주택 공급’의 하나로 서울 용산의 코레일 정비창 부지에 아파트 8000가구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원래 2006년부터 ‘한강 르네상스’ 사업과 연계해 국제업무지구로 조성하고 세계적 랜드마크가 될 건물들을 지으려던 곳이다. 금융위기 등으로 좌절돼 10여 년간 표류하다가 작년 말 부지를 둘러싼 소송이 일단락되면서 개발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토부가 발표한 새로운 계획은 이전보다 업무시설을 줄이고 임대아파트 등 아파트를 늘리겠다는 것이다.

서울 집값이 크게 오르고 새로 지을 공간도 별로 없으니 공기업이 가진 땅을 활용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한다. 경기가 나빠 사무실이나 상가는 분양이 잘 안될 테고, 아파트를 짓는 것이 건설 자금을 확보하는 데도 유리할 것이다. 일부 기업이나 부자에게 특혜를 주기보다 서민들을 위한 공공아파트를 짓겠다는 것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서울 중심가에 오롯이 하나로 붙은 51만 m²라는 넓은 땅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들다. 이미 사유지가 된 주변 지역들도 아니고 국민 모두의 재산인 공유지의 활용 방법은 좀 더 고민하는 게 맞다. 아파트를 지으면 입주하는 사람들만 ‘로또’에 당첨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민간 기업이 아닌 LH나 SH가 저렴한 건설비로 명품 건축물을 지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도시계획 전문가는 아니지만 서울의 핵심부는 베드타운으로 만들기보다 글로벌 기업들이 입주하는 첨단 산업과 문화·예술이 어우러진 국제지구로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서울 강북은 고궁과 쇼핑몰 외에 문화·예술 시설이나 첨단 산업이 부족하다. 서울시와 정부는 청년과 신혼부부들을 위한 주택을 짓겠다고 하지만 생산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라야 생명력이 있다. 서울 강남과 경기 판교가 젊고 활기찬 것은 IT 등 첨단 벤처기업들이 많기 때문이다.

뉴욕 맨해튼에는 지난해 초대형 복합 주거·사무·쇼핑·여가 단지인 ‘허드슨 야드’가 개장해 벌써부터 세계적인 명소가 됐다. ‘부자들의 놀이터’라는 비판도 있지만, 독특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페이스북 등 첨단 기업들이 둥지를 틀어 제2의 실리콘밸리로 떠오르고 있다. 철도 차량기지였던 이곳도 1950년대부터 여러 차례 개발계획을 세우고 무산되기를 반복하다가 이번에야 건설됐다.

용산은 역사적 의미가 깊고 앞으로 통일 한국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지역이다. 마지막 남은 대규모 공유지를 5년 단임 정부가 부동산 가격 안정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처럼 성당 하나도 몇백 년에 걸쳐 짓는 나라들이 많다. 용산 정비창을 포함한 서울의 설계는 100년 이상을 내다보는 긴 안목으로 전문가와 국민들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한 뒤에 결정해야 한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