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금융 달라져야 산다]<2> 실력부족 드러낸 금융사들
2년여 전 SC제일은행은 서울 강남권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던 라임자산운용의 사모펀드를 판매할지를 놓고 자체 검증 작업에 착수했다. 라임에 대해 △경영진 △재무 현황 △펀드매니저 △의사결정 구조 △리스크(위험) 관리 △금융사로 위험 전이 가능성 등을 심층 분석했더니 6개 항목 모두 ‘불합격’이었다고 했다. 콜린 치앙 SC제일은행 자산관리본부장은 “한 달 이상의 검증 과정을 통과해야 상품을 판매할 수 있다. 선진국 금융사의 프로세스는 한국보다 고도로 세분화돼 있다”고 설명했다.
대규모 투자 피해를 불러온 해외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와 라임 사태에서 국내 금융사와 외국계의 명암이 갈렸다. 한국 회사들은 해당 펀드를 대규모로 판매한 반면 외국계인 SC제일은행과 씨티은행은 아예 취급하지 않았다. 금융권에선 “금융의 기본인 리스크 관리 능력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는 자조 섞인 반응이 나온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제대로 검증하지 못하거나 실사를 했어도 중요한 사항을 놓치는 실수가 많았다. 결과는 투자자 피해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약 5200억 원어치가 판매된 ‘독일 헤리티지 파생결합증권(DLS)’의 경우 2016년부터 독일 언론이 해당 상품의 기초자산을 보유한 독일 현지 부동산 시행사의 사기 가능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국내 금융사들은 독일 부동산 채권을 펀드에 담은 싱가포르 반자란자산운용에 대해서만 평가를 했고, 범죄로 피해를 입을 경우 배상을 받을 권리 확보에 소홀했다.
KB증권이 판매한 ‘JB호주NDIS 펀드’는 현지 실사를 소홀히 했다 문제가 생겼다. 라임의 무역금융펀드 환매 중단도 미국 무역금융 전문 투자사 더인터내셔널인베스트먼트(IIG)의 ‘폰지 사기’(신규 투자자의 자금을 기존 투자자에게 이익으로 주는 다단계 금융 사기)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한 게 컸다. 일본의 한 투자사 대표는 “야쿠자(일본 조직폭력배) 연루 의혹 탓에 일본 금융사가 투자하지 않는 곳에 한국 금융사들이 투자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판매사들은 이렇게 도입한 상품에 높은 수수료를 붙여 팔았다. 은행들은 라임 펀드를 팔면서 원금에서 평균 1%가량을 선취수수료로 떼어 갔다. 한 상품이 잘 팔린다 싶으면 금융회사들은 너도나도 들여오기 급급했다. DLF의 경우 우리은행 내부에서 독일 등 해외 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면 전액 손실이 날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펀드 환매하려 했더니 집까지 찾아와 말리더니 문제가 생기자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대신증권을 통해 라임 펀드에 총 6억 원을 투자했던 A 씨는 2019년 7월 말경 직원이 자택까지 찾아와 깜짝 놀랐다고 했다. 펀드를 환매하려던 A 씨에게 직원은 “환매하지 말아 달라. 내가 다른 증권사로 이직할 예정이니 계좌 이관을 신청해 달라”며 사정했다. A 씨는 “이후 라임 펀드가 문제가 되자 연락 한번 안 주더라”면서 “투자자를 위하는 척했지만 실적 유지가 주목적이었던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금융당국이 라임 펀드에 대한 검사에 나서고 수익률 돌려 막기와 사기 의혹이 불거진 후에도 대신증권 장모 전 반포WM센터장은 설명회를 열어 “안전하다. 은행 예금처럼 위험을 최소화했다”고 했다. 지난달 금융감독원은 장 전 센터장을 사기 판매 등의 혐의로 검찰에 수사 의뢰했다.
소비자들은 금융사들이 상품을 판 뒤 관리에 소홀한 점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1월 금융위원회가 전국 성인 1045명을 대상으로 진행해 발표한 ‘금융소비자 보호 국민 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73.0%는 ‘금융사가 판매 후 고객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 75.7%는 ‘사고나 피해 발생 시 책임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성환 한국금융학회장은 “금융사가 부족해서 라임 사태 등이 터진 점도 있지만 금융사만 처벌하고 넘어가서는 바뀌는 게 없다”며 “금융사, 당국, 소비자라는 시장의 3대 플레이어가 서로 믿을 수 있도록 실력을 키우고 스마트한 규제 원칙을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건혁 gun@donga.com·김동혁·장윤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