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의 전자오락실 풍경. 오락기는 당시 최첨단 정보기술(IT) 기기였다. 이 앞에 앉는 어린이는 정신을 잃고 다른 세계로 갔다. 영화 ‘매트릭스’ 속 네오나 진배없었다. 동아일보DB
임희윤 기자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곡들의 제목은 ‘코로베이니키’ ‘트로이카’ ‘칼린카’. 그 단조의 음울한 ‘소련’ 멜로디가 고막에 들러붙을 때쯤이면 “희윤아! 집에 가야지!” 소리가 어디선가 섞여 들렸다. 화려한 크렘린궁, 다소 기괴한 민속춤과 함께 그 음악은 저 멀리 동토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자극했다. 냉전시대 끝자락에 즐긴 테트리스는 그래서 더 내밀하고 달콤했다.
며칠 전, 스마트폰에 옛날 게임 ‘슈퍼마리오’와 ‘트윈 코브라’를 내려받아 플레이하다 온갖 게임음악의 추억 미로에 갇히고 만 것이다.
치아니는 누군가에게 목소리로 더 유명할지 모르겠다. 1980년대 인기 핀볼게임 ‘제넌(Xenon)’에 성우로 참여했다. 힘차게 쏘아올린 구슬이 내려오며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딪힐 때 교성을 내는 좀 야릇한 역할. 치아니는 그러나 이 게임의 작곡과 일체의 사운드디자인까지 맡았다. 거대한 음악 마스터였던 셈이다.
#2. 1980년대는 아케이드 게임의 백가쟁명기다. 북아일랜드 출신 작곡가 마틴 골웨이는 이 분야의 일류 전문가다. 전 세계에 퍼진 그의 ‘식민지’에는 당시 해가 지지 않았다. 1980년대 지구상의 오락실에서 끊임없이 이 형님이 만든 음악이 울려 퍼졌기 때문. ‘쿵푸’ ‘핑퐁’ ‘람보’ ‘아카노이드’(벽돌 깨기)에 흐른 음악이 다 골웨이의 솜씨다. 사운드 칩(chip)으로 만드는 소리, 즉 칩튠(chiptune) 분야의 모차르트인 셈이다.
#3. 이런 소리를 8비트 사운드라고도 부르는데, 이게 너무 좋아 칩튠에 헤비메탈을 결합한 밴드도 있다. 미국 밴드 ‘호스 더 밴드’는 ‘닌텐도코어’ 장르를 창시했다. 하드코어 펑크를 위시한 강렬한 장르에다가 파생어를 만드는 접미어 코어(core) 앞에 게임기 이름을 붙였다.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칩튠에 육중한 메탈을 결합한 이들의 내한공연을 몇 년 전 서울에서 봤다. 8비트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헤드뱅잉을 하는 이들의 폭발적인 무대 매너는 귀엽고 웃기고 멋졌다.
#4. 서구에서는 일찍이 게임음악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뛰어난 작곡가를 고용해 중독적인 배경음악을 만들어냈다. ‘인크레더블’ ‘업’ ‘코코’의 영화음악가 마이클 저키노는 원래 게임 전문 작곡가였다. ‘메달 오브 아너’ ‘콜 오브 듀티’ 같은 1인칭 슈팅 게임을 주로 다루다 할리우드에 입성했다.
#5. 다큐멘터리 ‘차마고도’, 영화 ‘천년학’으로 유명한 재일음악가 양방언 역시 ‘아이온’ ‘아스타’ 같은 게임음악을 맡으며 팔자에 없던 게임을 처음 접하게 됐다고 했다. 게임음악 특화 연주자도 있다. 가수 하림이다. 우드(아랍) 발랄라이카(러시아) 부주키(그리스) 니켈하르파(스웨덴) 마두금(몽골) 시타르(인도) 같은 세계 곳곳의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연주자로 국내에서 독보적이기 때문.
“사막이 배경이라고요? 사하라 쪽일까요, 고비 쪽 느낌일까요. 고비라면 몽골악기를 들고 가고요.” “해전이라면 그리스의 부주키가 좋을까요, 바이킹 악기 니켈하르파가 좋을까요?” 의뢰 전화를 받는 하림의 모습은 대충 이렇다.
#6. 지난해 게임 과몰입을 질병코드로 등록한 세계보건기구(WHO)가 입장을 바꾸는 분위기다. 얼마 전,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해 음악 감상, 독서, 게임을 권장하는 트윗을 사무총장이 직접 올렸다. ‘음악 환자’로서 오늘밤엔 스마트폰을 오디오에 연결해볼 생각이다. 조그만 화면과 커다란 음향의 부조화가 얼마나 매력적일지 확인해볼 작정. 그러나 전문 게임기 구입 여부는 더 생각해보려 한다. 게임과 나 사이엔, 어느 정도의 거리가 필요하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