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1세대가 키운 한인 의사 맹활약 위기 속 美 한인사회에 희망 전해
박용 뉴욕 특파원
남 씨는 이날 동료 한인 의사 10명, 의대에 재학 중인 한인 학생 10명과 한 팀이 돼 동포 278명의 혈액을 채취하고 항체 유무를 검사했다. 방호복을 벗을 수 없어 점심을 거르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6시간 넘게 일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다. 휴식도 마다하고 동포들을 돕는 의대생 후배들의 열정이 영양제처럼 느껴졌다. 남 씨는 “코로나19 위기로 힘들어하는 부모님 같은 한인 동포들을 생각하면 주말에도 쉴 수 없었다”고 말했다.
남 씨는 14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민 1.5세대. 그의 부모님은 네일숍과 생선가게를 하며 힘들게 그를 뉴욕의 의대까지 보냈다. 미 정부 통계에 따르면 한인 이민 1세대의 주류는 음식점, 건강관리, 교육, 세탁업 등에 종사했지만 2세대는 남 씨처럼 컨설턴트,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으로 많이 일한다.
과거 한인 사회는 이념, 지역, 이해관계에 따라 사분오열하며 대립해 후대를 실망시키는 일이 꽤 있었다. 일부 명망가는 한국 정치권에 주파수를 맞추며 ‘몸은 맨해튼, 마음은 여의도’라는 비판도 들었다. 이번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생명을 지키기 위해 똘똘 뭉친 한인 의사들은 달랐다.
의대생 단체까지 포함된 5개 한인 의사단체는 3월 태스크포스를 결성하고 동포 지원을 위한 핫라인 개설과 무료 항체 검사까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이현지 뉴욕한인의사협회장은 “부모 세대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주고 후배 의대생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사명감이 우리를 뭉치게 했다”며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도 커다란 자부심을 느끼게 해줬다”고 말했다.
12일 미국 공영방송 PBS는 한국 중국 일본 등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이민사를 다룬 특집 방송을 내보냈다.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도산 안창호 선생의 후손들부터 1992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다시 일어선 한인들의 눈물과 아픔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는 시구는 파란만장한 한인 이민사에도 잘 들어맞는다.
이번 코로나19 위기는 한인 이민사의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위기가 끝나면 한인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 수 있다. 일부는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한인 사회는 위기를 딛고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더 단단해질 것이다. 117년 미주 한인 이민사가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환난상휼’ 정신으로 맹활약하고 있는 한인 청년 의사들이 그런 희망을 보여준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