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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감정을 넘어야 오는 것[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입력 | 2020-05-18 03:00:00

<15> 5월의 시




※이 글에는 영화 ‘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5월에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있고, 현금과 회식과 카네이션과 선물이 넘친다. 5월은 아마도 푸를 것이고 아이들은 아마도 자랄 것이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본다. 본 적이 있는 영화이기에 ‘시’가 얼마나 힘든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알고 있다. 이제 이런 영화는 잘 보아내지 못한다. 이번에도 며칠에 걸쳐 조금씩 보아나간 끝에 간신히 다 볼 수 있었다.

‘시’는 물에 떠내려 오는 소녀의 시체로부터 시작한다. 남학생들의 집단 성폭력에 시달린 끝에 초등학교 여학생이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이다. 그 남학생 중에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 66세의 할머니 양미자가 끔찍하게 아끼는 손자도 있다. 가해자의 가족들, 학교 교감, 언론사 기자는 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기 위해 공동 대응에 나선다. 못생긴 애를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하면서, 가해자 아이들의 인생과 학교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합의금으로 소녀의 엄마를 무마해 보기로 결정한다.

양미자는 듣다 못해 빠져나와 꽃을 보며 시를 쓰려고 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일이라는데, 꽃을 본다면 시가 써지지 않을까. 원래 꽃도 좋아하고 이상한 소리도 잘하니까 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시는 써지지 않는다. 대상을 진정으로 바라봐야 시상이 떠오른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시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시 창작 교실에도 다니고, 인생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건만 시는 좀처럼 써지지 않는다.

시가 오지 않아 초조한데, 가해자 아버지들은 양미자에게 할당된 합의금을 구해 오라고 닦달한다. 아이의 엄마는 이혼하고 타지로 간 지 오래. 양미자는 반신불수의 “회장님”을 씻기는 일로 연명하고 있는데, 어떻게 갑자기 500만 원을 마련한단 말인가. 어느 날 회장님은 비아그라를 먹고, 죽기 전에 양미자와 섹스를 하고 싶다고 애원한다. 사람을 대체 어떻게 보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나 양미자는 결국 회장의 소원을 들어주고, 합의금으로 쓸 500만 원을 받아낸다.

합의금을 다 모은 가해자 아버지들은 이제 사건을 무마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다들 입 닥치고만 있으면 이 사건은 조용히 묻히게 될 것이다.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아도, 이제 이 사건은 묻히게 될 것이다. 아무도 깊이 반성하지 않아도, 이제 이 사건은 묻히게 될 것이다. 손자가 반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양미자는 죽은 소녀의 사진을 밥상 앞에 놓아 본다. 손자는 태연히 TV를 보고, 밥을 먹고, 훌라후프를 한다. 반성하지 않는 손자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은 이때, 양미자는 갑자기 손자에게 좋아하는 피자를 사주고 목욕을 시키고 손발톱을 깎은 뒤, 손자를 고발한다. 그리고 형사가 도착할 때까지 손자와 마지막 배드민턴을 친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자살한 것으로 보이는) 양미자가 남긴 시가 낭독된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고, 시를 쓰고 싶은 사람도 제법 있건만, 오직 양미자만이 시를 써낸 것이다. 시 낭송과 함께 카메라는 양미자의 눈으로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준다. 양미자가 탔던 시외버스, 피해자 엄마를 만나러 갔을 때 보았던 들판, 시를 쓰기 위해 상념에 잠겼던 공터, 환하게 부서지던 햇빛. 카메라는 마침내 죽은 소녀의 얼굴에서 멈춘다. 투신하기 위해 강물을 바라보던 소녀는 돌아서 양미자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 대면이 시를 낳는다.

시는 언제 오는가? 시는 사람이 사(私)를 넘어 공(公)이 될 때 온다. 자신의 사적인 감정을 후벼 팔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넘어선 나머지 더 이상 자신이 될 수 없을 때, 시는 온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손자를 고발해야만 할 때 비로소 온다. 시는 사적(私的)인 에고가 부서져 남은 공적(公的)인 사금파리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