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新목민심서-공직사회 뿌리부터 바꾸자]<11> 연구용역 뒤에 숨은 공직사회
2017년 7월 서울중앙지법 법정. 정부가 청와대 지시로 대기업에 유리하게 신규 면세점 특허 수를 늘리려 했다는 의혹과 관련한 재판이 진행됐다. 이 재판에 출석한 A 교수는 정부가 연구용역의 결론에 미리부터 개입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연구용역의 내용을 원하는 쪽으로 유도하고, 이를 방패막이 삼아 정책 방향을 바꿨다는 것이다.
A 교수와 함께 용역에 참여한 다른 연구원도 “기획재정부로부터 특허 수를 늘리는 방안을 보고서에 넣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용역을 발주한 기재부 담당자는 법정에서 이를 인정하면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정부 연구용역이 정책의 정당성을 형식적으로 뒷받침해주는 용도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보고서의 결론을 미리 알려주고 연구기관들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충실하게 따르는 ‘청부용역’이 만연하고 있다는 것이다.
○ 형식적인 연구용역, 결과는 ‘답정너’ 보고서
“공무원들이 원하는 답은 항상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도 우리한테 용역을 의뢰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이들이 어떤 정책을 추진해도 ‘면피’가 되기 때문입니다.”서울 소재 대학의 B 교수는 최근 수년간 정부의 각종 정책 연구용역에 참여해왔다. 그가 내린 결론은 대부분의 연구용역이 신규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형식적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B 교수는 “연구자들끼리 얘기해 보면 이런 식의 무의미한 용역이 전체의 70∼80%에 이른다”고 전했다.
정부가 원하는 용역 보고서의 결론이 항상 정해져 있다 보니, 각 부처는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충실히 들어줄 특정 연구자들을 선호한다.
요즘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발주 단계에서부터 원하는 결론을 내줄 수 있는 연구자를 찾아 용역을 맡기는 사례도 적지 않다.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는 “특정 기관·연구자와 지속적으로 수의계약을 체결해 연구가 편중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한 연구기관은 소속 연구원이었던 모 교수에게 2011∼2015년 총 10건을, 다른 교수에게는 7건을 몰아줬다”고 발표했다.
서울 소재 대학의 D 교수는 “각각의 방안에 대한 정책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하는데 무조건 한쪽으로 결론을 내라고 하니 입김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불필요한 ‘청부용역’에 예산 낭비
지난해 대구 중구, 북구, 달서구, 달성군 4개 구군은 일제히 새로운 시청사 부지를 찾는 연구용역을 각각 발주했다. 새 청사 건립 논의가 본격화되자 저마다 청사 유치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접근성, 상징성, 균형발전 등 4개 구군이 내세운 새 청사의 부지 기준은 서로 유사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각 용역 보고서는 용역을 맡긴 지자체가 시청을 유치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 용역에 각 구군은 2000만 원씩, 총 8000만 원에 가까운 비용을 썼다. 대구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4개 구군의 ‘청부용역’은 예산 낭비일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불신과 갈등을 키우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부처와 지자체, 공공기관은 2017년 4600억 원을 들여 6452건의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한 해 5000억 원 가까운 예산이 쓰이는 셈이다. 공공요금, 세제 개편 등 민감한 주제부터 도로, 철도 건설 등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주제까지 연구용역의 범위에는 제한이 없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이해관계가 있는 정부부처나 지자체는 연구용역을 직접 발주할 수 없게 하고 국회나 총리실에서 객관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용역 공고를 낼 때 함께 공지하는 과업지시서에 정책 목표와 분석 내용을 명확하게 정해줘야 나중에 용역 내용이 임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