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허영만의 딸 허보리 작가
서울 중구 정동의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구(舊) 신아일보사 별관 건물이 나온다. 1930년대에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어진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다. 일제 시대 건축기법이 잘 남아 있는데다, 외벽이 중국 상하이에서 가져온 붉은 벽돌로 장식돼 있어 구한말부터 외교 각축전이 벌어졌던 정동길의 근대 건축물 기행의 단골 답사처이기도 하다.
이 건물의 지하로 들어가보면 헬리오아트라는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가 있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 건물에 자리잡은 갤러리의 분위기가 꽤나 운치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그림이 전시실에 가득하다.
사진1-‘장미가족’ 그림 앞에 선 허보리 씨.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정면에 장식된 그림이 뭔가 의미심장하다. 가족사진인 것 같은 데 가족들의 얼굴이 있어야 할 부분에 꽃이 피어 있다. 아버지의 얼굴엔 장미꽃이, 어머니는 소국(小菊)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남편의 얼굴엔 다육식물이, 오빠는 맨드라미, 딸은 흰색 수국, 어린 아들은 제비꽃이 얼굴대신 그려져 있다.
“꽃은 작은 봉오리로 피기 시작했다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나고, 점차 꽃과 줄기가 말라가고, 시들어가는 과정을 이어갑니다. 가족사진을 볼 때마다 어린 아이부터 나이든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함께 있는 사진이 꽃처럼 피었다가 지는 사람들의 인생을 사진 한 장으로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오래 전부터 ‘장미와 통닭’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해왔어요. 장미는 꽃의 대중적인 상징이죠.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죠. 사람들은 감성적인 측면에서 장미꽃 같은 삶을 동경하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서는 통닭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비유입니다. 글쎄요. 아버지는 통닭을 자주 사오시진 않았지만, 늘 장미꽃같은 삶을 동경해오셨죠.”
―남편은 선인장인가요? 왜 다육식물로 그렸죠?
“다육식물은 물을 잘 주지 않아도 죽지 않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죠. 선인장은 수분이 없어도 잘 살아요. 제 남편도 건조한 사람이거든요. 만화가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한번도 양복을 입어보신 적이 없어요. 그런데 결혼해보니까 금융권에서 일하는 남편이 매일 양복을 입고 다니는 거예요. 저랑은 완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물을 많이 주면 죽은 다육식물처럼, 남편도 너무 감성적인 면을 강조하면 숨막혀 해요. 약간의 유머코드가 들어 있는 그림이죠.”
사진2 허보리 ‘Flower Portrait Blackred’. 헬리오아트 제공
어릴 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허 씨는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설치작업을 주로 해오던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어릴 적부터 가다듬어 온 탄탄한 드로잉에 기초한 유화작품을 선보였다. 삶의 유한함과 허무, 죽음을 담은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를 연상케하는 짙은 어두운 배경 위에 피어있는 꽃들이 인상적이다. 꽃을 자세히 보면 싱싱하게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가 있는가 하면, 말라 비틀어져 죽은 줄기와 꽃들이 섞여 있다.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빛과 어둠은 삶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저도 작업실에서 창문에 커튼을 쳐놓고 어두운 상태에서 드로잉을 하고, 유화물감으로 칠했어요. 꽃이 너무나도 예뻤던 순간부터, 약간 살짝 건조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하루아침에 고개가 꺾이는 날까지 매일매일을 기록하듯이 그렸습니다. 한 작품당 보름 이상에 걸쳐서 그리다보니 한 캔버스에 꽃들의 삶과 죽음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게 됐습니다.”
허보리 ‘Green Abstract1’ 헬리오아트 제공
또다른 대형 캔버스에는 풀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그가 그린 풀잎들은 무용수가 춤추듯이 색깔도 형태도 자유분방하다. 그는 “척추에서 나오는 반응으로 작업을 한다”고 했다. 대상을 바라보고 어떤 느낌이 들면 머릿 속에서 곰곰이 생각하기전에, 허리나 척추 쯤에서 곧바로 나오는 반응으로 붓터치를 시작한다고 했다.
“몇 년 전 돌아가시기 직전에 마주한 할머니의 모습은 마른 풀 같았어요. 정신이 오락가락한 할머니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다 보니 얼마 전 형편없이 시든 꽃을 쓰레기통에 넣기 위해 화병에서 들어올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늘 흠모해왔던 바니타스의 그림들이 스쳐갔습니다. 인간의 삶을 빠르게 돌려보기 하는 것 같은 낙화의 과정을 한 화면에 담고 싶었어요. 어제 그렸던, 좀 더 피어있던 모습을, 오늘은 지워내고 다시 그 위에 지금의 하루를 기록했습니다. 그림을 지워내는 일은 어제의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은 그런 안타까움도 없지 않았어요. 그러나 자꾸 희미한 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지나간 어제처럼 우리의 내일도 분명한 것이 없으니….”
허보리 ‘Flower Portrait Burnt’. 헬리오아트 제공
만화가의 딸, 숨길 수 없는 유머와 풍자
그는 남자의 낡은 양복을 뜯어내 탱크를 만들고, 다리가 삽으로 된 식탁(작품명 ‘삽탁’)을 만들어 양복을 입고 전쟁터같은 직장에 나가고, 삽질을 해야만 먹고사는 현대인의 모습을 풍자하는 설치작업을 하기도 했다. 그는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만화를 보고 자라서인지 제 작품에는 유머와 풍자와 같은 만화적 상상력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말했다.허영만 화백은 이 낡은 집을 아직도 작업실로 쓰고 있다. 그는 이 화실에서 만화 ‘식객’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딸 보리 씨는 “아버지께서 요즘에는 일이 별로 없고, 문하생도 없어서 적적해하실까봐 제가 이 집의 지하로 들어가 작업실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허보리 ‘240송이 장미와 228마리 통닭’ OCI미술관 제공
허보리 ‘240송이 장미와 228마리 통닭’ OCI미술관 제공
―‘장미와 통닭’이라는 주제는 어떻게 생각해내신 겁니까.
“김엄지 작가의 책을 읽었는데, 쳇바퀴같은 삶을 ‘장미와 통닭’에 비유한 소설이었어요. 원래 주인공의 꿈은 요트를 타고, 시도 한 소절 써보는 것이 로망이었어요. 그런데 나의 지금의 삶은 무엇인가. 월화수목금은 회사에, 토일은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생활, 그런데 밖에는 비가 내리고…. 그런 삶이 꼬챙이에 꿰어져 전기구이, 장작구이로 돌아가는 통닭같은 삶이죠. 그럼 나의 장미는 정말 어디에 있나. 장미와 통닭이 반복되는 삶. 맨날 고민하잖아요. 아, 오늘은 장미처럼 살 것인가, 통닭처럼 살 것인가. 그래서 10m 짜리 벽에 240송이 장미와 228마리의 통닭을 그린 적이 있어요. 벽지처럼 반복되는 패턴이죠. 월화수목금토일로 반복해서 사는 게 벽지의 패턴과 똑같다고 느꼈거든요.”
허보리 ‘부드러운K1A1 전차’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그림을 보면서 ‘아, 이렇게 그릴 수도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지금 돌아보면 제 초기작품은 유머와 풍자 코드, 만화적 상상력이 많았던 것 같아요. 남자의 양복으로 무기를 많이 만들었어요. 출근할 때 입는 양복은 군대의 군복과 같아요. 낡은 양복을 뜯어내 길이 4m짜리 탱크를 만들기도 했요. 잘 보면 포신이 땅에 늘어져 흐느적거리고 있어요. 성적인 코드가 있다고 해석하시는 분들도 있고, 퇴근하는 남자의 뒷모습 같은 모양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어요. ‘삽탁’은 다리가 삽으로 된 식탁 설치작품이예요. 삽질을 해서 4인 가족이 먹고 사는 모습을 블랙코미디로 표현한 거예요.”
서울 중구 정동 헬리오아트 갤러리에서 허보리 씨.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허 씨는 그동안의 설치작업과 달리 이번 전시회에서는 드로잉과 회화로 돌아갔다. 그는 “설치작업은 생각했던 것을 표현하는 데 몇 달이라는 작업 시간이 필요한 데, 회화는 내가 받은 느낌을 가장 빠르게 표현해낼 수 있는 작업방법”이라고 말했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과 딸 허보리 작가.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