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신이현 작가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
글쎄,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나의 잘못인가? 나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지고 대답해야 한다. 정치와 문화는 물론이고 농업과 국세청과 식약처 등등 그 모든 분야에 책임감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으면 그는 콧방귀를 뀌기도 한다. 레돔은 하루에 몇 번씩 일기예보를 체크한다. 특히 잠자기 전에 보는 내일의 일기예보는 아주 중요하다. 날씨에 맞춰 농사지을 준비를 다르게 하기 때문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가장자리에 놓이게 되면 대기가 불안정해 호우가 내리는데 수축 정도를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라고 하잖아. 여기 이렇게 대답해 놓았잖아.” 이런 나의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시무룩하다. 꽁꽁 묶인 죄인처럼 신음하며 말라가는 어린 포도나무를 들여다본다. 5000L의 물을 끌어와 한 그루씩 주지만 한낮의 뙤약볕에 금방 다 말라버린다. 농부도 신음하고 나무도 신음한다. “내일은 정말 비가 온대. 돌풍을 동반한 많은 비가 전국에 내릴 거래!” 내가 장담하면 그는 바보처럼 설렌다. “한바탕 쏟아지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일인가. 강수량 5mm라고 예보한 어느 날 밤 천둥이 우르릉거리며 터지더니 후드득 소리와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의 아스팔트를 두드리는 소리를 보아하니 아주 굵직한 비다. 곧이어 콸콸콸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내린다!” 이불 속에서 그가 조용히 한마디 하더니 다시 잠 속에 빠져든다. 설마 환청은 아니겠지. 아침에 창문을 여니 세상이 달라져 있다. 온 세상이 깨끗해졌다. 공기는 신선한 물기로 가득하다. 태양도 말끔하게 빛난다. 나무가 춤을 춘다는 말의 뜻을 알겠다. 나뭇잎에 붙은 물방울들이 반짝거리며 넘실댄다. 세상이 다시 살아났다! “아, 비 온 뒤 땅에서 올라오는 이 축축한 흙냄새 너무 좋아!”
우리는 곧장 포도밭으로 달려가서 황홀하게 숨을 들이마신다. 비바람에 반쯤 누워버린 호밀을 밟으며 걸어가니 초록 줄기가 땅에서 이지러지면서 신선한 풀 냄새를 풍긴다. 새들이 날아가며 지저귄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밤새 물을 흠뻑 들이마셔 한껏 유쾌해져 있다.
어린 포도나무들도 물방울을 머금고 말간 잎을 내밀고 있다. 어느새 쑥 자라버렸다. 따가운 햇볕을 가려주는 그늘막 역할을 해주었던 호밀은 이제 너무 자라버렸다. 이렇게 비가 내린 다음에는 바람이 잘 통해야 하기 때문에 호밀을 눕혀줘야 한다. 장화 발로 키 큰 호밀을 밟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면서 사가각사가각 소리를 낸다. 젖은 호밀 밟히는 소리에 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겠다. 바지가 축축하게 젖고 머리카락도 푹 젖었다.
“와, 저 산 좀 봐!” 레돔이 허리를 펴고 감탄한다. 앞에 보이는 산에 비구름이 몽실몽실하게 맺혀 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저 산에는 분명 정령들의 마을이 있을 것 같다. 산속에 뽀얗게 걸린 저 비안개는 온 동네 정령들이 날아다니며 젖은 머리카락을 털면서 생긴 물방울 가루들일 것이다. 내가 저 하늘을 날아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이런 마법 같은 순간은 농사를 짓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 프랑스인 남편 도미니크 에어케(레돔) 씨와 충북 충주에서 사과와 포도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습니다.
신이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