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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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보도가 털끝만큼도 달라진 흔적이 없다.’일제 총독부는 1920년 9월 25일 동아일보에 무기정간을 때리면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이날 자 사설에 일본 왕실의 3종 신기를 우상이라고 한 것이 무기정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죠. 하지만 총독부는 이 문제만을 놓고 분노가 폭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총독부가 내민 정간 이유서에는 동아일보가 왜 눈엣가시였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발행정지 5개월 만에 속간된 이듬해 2월 21일자 1면에 실렸죠.
이유서는 ‘창간 때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복리증진과 문화발전에 공헌할 것으로 기대했더니 곧 과격한 보도와 논설을 실어 자주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평양에서 만세소요’를 시작으로 정간 때까지 24건의 압수와 삭제처분을 받았죠. 이때마다 새로 인쇄를 해야 해서 손실이 막대했습니다.
정간이 풀린 뒤 처음 나온 1921년 2월 21일자 1면에 실린 '감사의 글'. 정간 기간 중 동정을 보내고 속간을 축하한 분들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의 뜻을 표시했다.
총독부를 향해서도 비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무차별인가 대차별인가(14회)’는 총독부의 민족차별 정책을 거리낌 없이 공격한 시리즈였습니다. 모두 총독부가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총독정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보도가 털끝만큼도 달라진 게 없다’고 결론지은 배경이죠.
이렇듯 동아일보는 총독부 권력 앞에 당당했습니다. 하지만 안으로는 신문사를 유지하지 못할 정도로 위기를 겪고 있었죠. 무엇보다 돈이 없었습니다. 창간 때 주주들로부터 25만 원을 모으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125억 원에 이르는 금액이었죠.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불황에다 국내 가뭄까지 겹쳐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간신히 10만 원을 모았으나 그마저도 대부분 인촌 김성수가 채워 넣어야 했죠.
인건비며 재료비며 늘 돈이 나가지만 판매나 광고수입은 형편없었습니다. 곧 10만 원도 바닥이 났죠. 2대 사장 김성수는 그 무렵 ‘탄압은 심하고 경제는 한정돼 있는데 아니 할 수는 없고 앞길은 까마득하다’고 속 타는 심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는 중앙학교를 인수한데다 경성방직을 세워 그때는 돈에 아주 쪼들렸습니다. 더구나 신문사 경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여서 부자들 사이에서는 신문사에 돈을 대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죠. 총독부가 1921년 1월 10일 정간을 풀어주었지만 재정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2월 말에 가서야 간신히 신문을 낼 수 있었습니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해로부터 7년 간 사용했던 사옥. 서울 화동에 있던 이 낡은 한옥은 중앙학교가 쓰던 건물로 널빤지와 양철판을 둘러 방을 마련했다. 초기 동아일보 임직원들은 이곳에서 여름 더위, 겨울 추위와 싸우며 신문을 만들었다.
동아일보 직원들도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정간 때는 견디다 못한 상당수 인쇄공들이 뿔뿔이 회사를 떠났습니다. 기자들도 여관 숙식비를 내지 못하거나 하숙에서 쫓겨나 편집국 책상에서 새우잠을 자기 일쑤였죠. 편집감독 유근이 아침 일찍 와서 “여보게들, 어서 일어나 해장국 먹으러 가세”라고 외치는 소리가 반가웠을 겁니다.
총독부는 이런 동아일보에 무기정간을 먹이면 곧 두 손 들겠지 라고 생각했겠죠.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가 김성수에게 말했습니다. “논조를 건실한 방향으로 고쳐주어야겠소. 그렇게 약속해준다면 내일이라도 정간은 해제될 거요.” 김성수는 “동아일보는 내 개인 것이 아니라 2000만 민중의 신문이어서 내가 여기서 무슨 약속을 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오”라고 대꾸했습니다. 이후에도 동아일보는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세 차례나 더 무기정간을 당했죠.
뒷날 밀린 숙식비를 갚은 한 동아일보 기자가 여관 주인에게 “그동안 왜 외상 독촉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나랏일을 보시는데 밥값을 달라고 할 수 있나요”라고 대답했죠. 당시 동아일보는 독자와 민족이 함께 만드는 신문이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本報(본보) 發行停止(발행정지)와總督府(총독부)의 主張(주장)
昨年(작년) 九月(9월) 二十五日(25일) 總督府(총독부)에서 本報(본보)의 發行停止(발행정지)를 命(명)하는 同時(동시)에 其(기) 理由(이유)로 警務當局(경무당국)의 發表(발표)한 바가 左(좌)와如(여)하더라.
二十五日(25일) 發行(발행)의 東亞日報(동아일보)는 發賣頒布(발매반포)를 禁止(금지)함과 同時(동시)에 無期發□(무기발□) 停止(정지)를 命(명)하얏도다. 盖(개) 東亞日報社(동아일보사)는 創立(창립) 當時(당시)에 朴泳孝(박영효) 侯爵(후작)이 스스로 此(차)를 統括(통괄)하야 穩健(온건)한 主義々張(주의주장) 下(하)에서 眞摯(진지)한 日鮮民族(일선민족)의 福利(복리)를 增進(증진)하며 文化(문화)의 發展(발전)에 貢獻(공헌)할 事(사)를 期待(기대)하얏더니 創刊(창간)한 지 不幾□(불기□)에 矯激(교격)한 言說(언설)을 揭載(게재)하야 屢々(누누)히 發賣禁止(발매금지)의 處分(처분)을 受(수)한 事(사)가 有(유)하며 朴(박) 侯爵(후작)은 編輯(편집)에 當局(당국)한 者(자)와 論議(논의)가 互相(호상) 不容(불용)함으로 遂(수)히 其(기) 社長(사장)의 地位(지위)를 辭退(사퇴)하얏는지라.
當時(당시)에 同(동) 新聞(신문)을 許可(허가)한 前提要件(전제요건)에 根本的(근본적) 變革(변혁)이라 할 수 잇스나 尙(상)히 幾多(기다) 有爲(유위)의 社員(사원)이 有(유)함에 信賴(신뢰)하야 其(기) 發行(발행)을 繼續(계속)케 함에 努力(노력)하얏더니 其後(기후) 其(기) 言論(언론)에 依(의)하야 發賣(발매)를 禁止(금지)한 事(사)가 十數回(십수회)에 及(급)하얏는 바 其(기) 言論(언론)의 ㅡ般民衆(일반민중)에 與(여)한 惡影響(악영향)의 顯著(현저)함을 看取(간취)하고 屢々(누누)히 個人的(개인적)으로도 懇談(간담)을 重疊(중첩)히 하야 其(기) 反省(반성)을 促(촉)함에 努力(노력)하얏스며 八月(8월) 中旬(중순)에 至(지)하야 特(특)히 發行人(발행인)을 召喚(소환)하야 其(기) 論議(논의)의 穩健(온건)을 缺(결)하야 幾乎(기호) 統治(통치)의 根本方針(근본방침)에 背反(배반)될 傾向(경향)이 有(유)함을 指示(지시)하고 此後(차후)에 若(약) 再次(재차) 發賣禁止(발매금지)의 處分(처분)을 行(행)할 時(시)는 不得已(부득이) 斷乎(단호)한 處分(처분)을 行(행)할 旨(지)로 最後(최후)의 警告(경고)를 與(여)하얏섯노라.
然而(연이) 其(기) 論議(논의)가 毫末(호말)도 變革(변혁)하는 形跡(형적)이 無(무)하고 但(단)히 表面的(표면적)으로 獨立(독립)을 煽動(선동)하는 事(사)는 避(피)하나 常(상)히 引例(인례)를 他國(타국)에 取(취)하며 巧(교)히 反語陰語(반어음어)를 用(용)하야 獨立思想(독립사상)의 喧傳(훤전)에 努力(노력)하는 形跡(형적)이 顯著(현저)하야 或(혹)은 羅馬(라마)의 興亡(흥망)을 論(논)하야 暗□(암□) 朝鮮(조선)의 復興(부흥)을 說(설)하며 或(혹)은 埃及(애급)의 現情(현정)을 論(논) 야 一波萬波(일파만파)로 遂(수)히 朝鮮(조선)의 독립(獨立)을 說示(설시)하며 愛蘭問題(애란문제)를 說(설)하야 朝鮮(조선)의 人心(인심)을 諷刺(풍자)하며 英國(영국)에 對(대)한 反逆者(반역자)를 贊揚(찬양)하야 反逆心(반역심)을 刺戟(자극)하는 等(등) 一一(일일)히 枚擧(매거)키 未遑(미황)하며 又(우) 總督政治(총독정치)의 批判(비판)을 爲(위)함에 當(당)하야는 公正(공정)한 理解(이해)를 爲(위)함에 努力(노력)치 아니하고 根本的(근본적)으로 總督政治(총독정치)를 否定(부정)하야 惡意的(악의적)의 推斷(추단)을 下(하)하야 總督政治(총독정치)에 對(대)한 一般(일반)의 誤解(오해)를 深切(심절)케 함에 努力(노력)하는 中(중)임과 如(여)하며
그리고 二十五日(25일) 發行(발행)의 新聞紙上(신문지상)에 偶像崇拜(우상숭배) 論(논)할새 殊(수)히 我(아) 帝國臣民(제국신민)의 信念(신념)의 中樞(중추)인 劒鏡璽(검경새)에 對(대)하야 無理解(무이해)한 妄說(망설)을 擧(거)하며 更(경)히 二十世紀(20세기)의 印度(인도)를 引用(인용) 야 英國(영국)의 惡政(악정)을 論(논)하되 暗(암)히 此(차)를 朝鮮(조선)과 對照(대조)케 함에 資(자)하랴 함과 如(여)한 바 其(기) 內容(내용)이 또 誇張虛僞(과장허위)의 點(점)도 不尠(부선)한즉 帝國(제국)의 新聞紙(신문지)로셔 友邦(우방)과의 國交(국교)를 阻害(조해)할 虞慮(우려)가 不無(부무)한 바 編輯(편집)에 當(당)한 者(자)는 或(혹) 謂(위)하되 同紙(동지)의 言論(언론)은 決(결)코 如斯(여사)한 意志(의지)를 有(유)한 것이 아니라 할지나 然而(연이) 都鄙讀者(도비독자)의 實際(실제)에 就(취)하야 觀(관)하면 同紙(동지)의 反影(반영)이 顯著(현저)하야 健全(건전)한 一般思想(일반사상)을 惑亂(혹란)케 함이 無疑(무의)할지로다.
以上(이상) 屢述(누술)함과 如(여)히 東亞紙(동아지)의 言論(언론)은 到底(도저)히 統治(통치)의 根本方針(근본방침)과 相容(상용)키 難(난)함으로 玆(자)에 不得己(부득이) 發行(발행)을 停止(정지)함에 至(지)한 所以(소이)로다.
현대문
본보 발행정지와 총독부의 주장작년 9월 25일 총독부에서 본보의 발행정지를 명하는 동시에 그 이유로 경무당국이 발표한 내용이 아래와 같다.
25일 발행한 동아일보는 발매반포를 금지함과 동시에 무기 발행정지를 명하였다. 대체로 동아일보사는 창립 당시에 박영효 후작이 스스로 이를 총괄하여 온건한 주의주장 아래서 진실로 일선(日鮮)민족의 복리를 증진하고 문화 발전에 공헌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창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과격한 보도와 논설을 실어 빈번히 발매금지 처분을 받은 일이 있다. 박 후작은 편집을 맡은 담당자들과 서로 의사가 맞지 않아 마침내 사장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때 이 신문을 허가한 전제조건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만 아직도 얼마간 유능한 사원이 있다고 믿고 발행을 계속하도록 노력하였다.
그 후 보도에 따라 발매를 금지한 일이 십 수회에 이르러 보도와 논설이 일반 민중에 미치는 악영향이 현저함을 보고 개인적으로도 누누이 터놓고 대화하여 반성을 촉구하는데 노력하였다. 8월 중순에 이르러는 특히 발행인을 불러 논조에 온건함이 없어 통치의 근본방침을 거의 저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주고 앞으로 만약 또다시 발행금지 처분을 내릴 때는 어쩔 수 없이 단호한 처분을 할 뜻을 마지막으로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 보도가 털끝만큼도 달라진 흔적이 없다. 단지 겉으로 독립을 선동하는 일은 피하지만 항상 타국의 사례를 인용하고 교묘하게 반어(反語) 음어(陰語)를 사용해 독립사상을 선전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혹은 로마의 흥망을 논하여 슬며시 조선의 부흥을 말하고 혹은 이집트의 현재 정세를 논하여 일파만파로 오직 조선의 독립을 알리고 아일랜드 문제를 말하여 조선의 인심을 풍자하며 영국에 대한 반역자를 찬양하여 반역심을 자극하는 등 일일이 나열하기 어렵다. 또 총독정치를 비판하는데 이르러서는 공정한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총독정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여 악의적인 추측과 판단을 내려 총독정치에 대한 일반의 오해를 깊게 하도록 힘쓰는 듯하다.
그리고 25일 발행한 신문지상에 우상숭배를 논하면서 특히 우리 제국신민의 신념의 중요 부분인 칼 거울 구슬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할 망령된 말을 하였다. 또 20세기의 인도를 인용하여 영국의 악정을 논하면서 슬며시 이를 조선과 대조하도록 한 것과 같이 그 내용이 허위 과장된 점도 적지 않으므로 제국의 신문지로서 우방과의 국교를 막을 우려가 없지 않다.
편집 담당자는 혹시 우리 신문의 보도와 논설에는 결코 그러한 뜻이 있지 않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서울과 시골 독자들의 실상을 보면 이 신문의 그림자가 뚜렷하여 건전한 일반사상을 어지럽히는 것을 의심할 것이 없다. 이렇게 여러 번 말한 것과 같이 동아일보의 언론은 도저히 통치의 근본방침과 서로 용납하기 어렵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행을 정지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