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홍콩공원 내에 자리한 ‘사스 추모 공원’. 2003년 사스 사태 당시 환자 곁을 지키다 희생된 의료진 299명 가운데 8명의 흉상이 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이설 국제부 차장
홍콩의 홍콩공원 내에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추모 공원’이 있다. 2003년 홍콩을 덮친 사스 환자들을 돌보다 숨진 의료진을 기리는 곳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창궐한 올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미국 시사지 포린폴리시 인터넷판은 최근 “의료진을 존중하는 문화, 선한 공동체 의식 등 사스가 홍콩에 남긴 유산이 코로나19 시국에 빛을 발하고 있다”고 전했다.
사스 사태 당시 감염되거나 과로로 목숨을 잃은 홍콩 의료진은 299명에 달한다. 홍콩인들은 목숨을 내놓고 환자 곁을 지킨 이들을 ‘사스 영웅’이라 불렀다. 요즘은 ‘코로나 영웅’들이 각국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감염 공포, 열악한 환경, 부족한 수면 속에서 의술을 펼치는 이들에게 대중은 열띤 응원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응원전을 두고 회의론이 제기됐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는 상황에서 응원은 현실적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당장 ‘멘털데믹(Mentaldemic)’ 관리가 시급하다.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의 죽음을 가까이에 두고 일하는 직업이다. 하지만 코로나19 병동에서 겪는 환자의 죽음은 차원이 다른 상흔을 남긴다고 인도 의사 발디 씨는 BBC에서 토로했다.
“감염 위험 때문에 대부분 중증 환자는 격리된 채 치료를 받습니다. 자연히 환자의 마지막은 의료진이 지키게 되지요. 가족 없이 죽음을 맞는 환자의 상황이 상당한 심리적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인도 남부 에르나쿨람 의대 중환자실장 파타후덴 박사는 “보통 환자의 가족과 함께 치료에 대한 정서적 부담을 공유한다. 하지만 코로나19 환자의 경우엔 그 짐을 의료진이 오롯이 져야 한다”며 “압박감을 해소하기 위해 정신건강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증 등을 겪는 현장 의료진이 적지 않다. 22일 미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따르면 코로나19 최전방에서 일하는 이탈리아 의료진 137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PTSD를 겪고 있었다. 20%는 우울 및 불안 증세를 보였다. 이런 증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대 연구팀은 최근 BBC에 “사스가 종식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도 당시 현장에서 근무했던 의료진의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유럽, 미국 등지에서 봉쇄 완화 조치를 속속 도입하고 있지만 의료진은 여전히 외로운 사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노고를 격려하는 연대도 뜻깊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최근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밤낮 없이 일하는 의료진에게 필요한 것은 박수가 아닌 보상”이라며 “의료진에 대한 보상과 복지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BBC는 “마스크 착용과 손 씻기, 사회적 거리 두기 등 방역 지침을 잘 지키는 것이 의료진을 도와주는 길”이라는 의사의 말을 전했다. 중장기적 심리적 보살핌과 보호장비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
영웅, 전사, 천사란 말도 좋지만 균형에 어긋난 희생은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다. ‘의료진을 위한 박수’를 처음 기획한 앤마리 플라스 씨도 이제 방향을 틀 생각이라고 최근 가디언에서 밝혔다.
“(비판 의견들이) 수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29일을 끝으로 응원전을 마무리할 계획입니다. 박수는 멈춰도 감사의 마음은 변하지 않을 거예요. 의료진을 지지할 다른 방법을 찾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