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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복을 빕니다]안중근 옥중 전기 등 찾아낸 ‘한일외교의 막후’

입력 | 2020-05-27 03:00:00

한일관계 연구 권위자 최서면 옹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30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일 관계 사료 발굴과 연구에 힘썼다. 동아일보DB


한일 관계 연구의 권위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26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강원 원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5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 정치과 학생으로 대한학생연맹 위원장을 맡아 김구 선생을 따라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참여했다.

고인은 국내 정치 상황 때문에 1957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후 30년 동안 도쿄에 머물면서 한일 관계 역사 자료 수집과 연구에 힘썼다.

일본에서 고인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 등 각계 고위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러한 친분을 바탕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일본의 정계 상황을 비롯해 한일 관계에 대한 조언도 했다. 7·4남북공동성명 당시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한국 정부가 일본에 미리 알려주지 않아 양국 관계가 악화됐을 때는 관계 개선에 기여했다. 앞서 장면 부통령에게 DJ를 소개해 정계에 입문할 수 있도록 해준 것도 고인이었다.

고인은 일본에 있으면서 안중근 의사의 자료 수집과 유해 발굴에 힘을 쏟았다. 1960년 일본 아세아대 교수가 된 고인은 1969년 안 의사의 옥중 자필 전기인 ‘안응칠 력사’를 처음 입수했다. 이후 도쿄한국연구원을 설립해 모은 안 의사 관련 자료 1000여 건을 2017년 연세대 국가관리연구원에 기증했다. 이 자료 중에는 1909년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 사용했던 중국 하얼빈 약도와 안 의사가 순국한 뤼순 감옥 구리하라(栗原) 교도소장의 일기 사본 등이 포함돼 있다.

3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1988년 귀국한 뒤에도 고인은 한일 관계사 자료 수집과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태종 2년(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일본에서 처음 찾아냈다. 이 지도는 현재 전해지는 동양의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입증할 수 있는 고지도를 수집, 연구했다. 1978년 야스쿠니(靖國) 신사에서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의병대장 정문부의 승리가 기록된 ‘북관대첩비’의 실물도 처음 확인했다. 일제강점기 이봉창 의사의 수사 기록 등도 발굴했다. 201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말년까지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를 지냈다.

일본에서도 고인은 ‘근현대 한일 관계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마이니치신문은 2018년 ‘한일 국교 정상화 빛과 그림자’ 기획 기사에서 고인을 ‘한일 외교의 괴물’이라고 소개했다. 고인은 당시 마이니치에 “어쩌면 (한일) 국교 정상화를 했을 때가 지금보다 정치인들이 서로 인정하고 솔직한 대화를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처럼 화해를 잊고 대결만 내세웠다면 (국교 정상화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일 관계 전문가인 고하리 스스무(小針進) 일본 시즈오카현립대 교수는 “고인은 ‘살아 있는 한일 현대사’라 불러도 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최서면박사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은 김황식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맡았다. 유족은 부인 김혜정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28일 오전 8시. 02-2258-5940

정성택 기자 neone@donga.com / 도쿄=박형준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