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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진실·화해 이후 남아공 행복한가

입력 | 2020-05-28 03:00:00

5·18 광주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 문 대통령 성장시킨 힘이 됐다
세계는 “5·18 과거청산 모범적” 평가
남아공모델엔 전직 대통령 처벌 없다
독재·부패·경제난이 국민통합 막아




김순덕 대기자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읽는 것도 고통스럽다. 미싱사 선주는 5·18 광주에서 계엄군에게 차마 글로 옮길 수 없는 고문을 당한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그가 되살아난 것은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의 힘, 분노의 힘으로’였다. 도청 안마당에 모로 누워있는 동호의 사진을 보면서다.

문재인 대통령도 취임 첫해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라고 했다. “그것이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 준 힘이 됐다”는 대통령처럼, 이 땅엔 5·18에 대한 분노와 부채의식으로 생각과 운명이 달라진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하늘이 무심치 않았는지 우리는 7년 만에 민주화를 쟁취해냈다. 문민정부의 대법원은 전두환, 노태우 등 5·18 진압 주범들을 내란 및 내란목적살인죄로 단죄했다. 이들이 사면 복권된 건 ‘민주정부 1기’ 김대중이 대통령 당선 뒤 김영삼 대통령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20년도 더 전에 광주 5·18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뤘고 법률적 정리까지 마쳤다”고 문 대통령도 작년 기념사에서 깔끔히 정리했다.

그럼에도 3기 민주정부는 진실을 낱낱이 못 밝혀냈다며 보름 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관련 조사로 치면 열 번째다. 이번엔 진실고백-용서-화해 프로세스의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이다.

남아공을 잘 모르는 사람도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는 안다. 1994년 흑인 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집권 뒤 과거 아파르트헤이트 체제(1960∼1994년) 고문, 살인, 납치 등 정치적 범죄를 공개 고백하면 사면조치를 내려 공동체 화해에 성공했다는 아름다운 얘기다. 문 대통령은 “이제라도 용기를 내어 진실을 고백하면 용서와 화해의 길이 열릴 것”이라며 가해자들의 고백을 촉구했다. 함께 기억하는 진실이 사회를 정의롭게 하고 국민을 통합시킨다고도 강조했다.

그렇다면 남아공은 지금 정의롭고 통합돼 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용서 없이 미래 없다”고 강조했던 위원장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가 “아파르트헤이트로 가장 고통 받던 이들이 지금도 가장 고통을 받고 있다”고 개탄했다는 게 최근 알자지라 보도다. 유능한 정치와 경제정책이 뒤따르지 못해 빈곤과 불평등이 극심해진 탓이다.

청와대는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발포 명령자의 고백을 고대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델라와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한 데클레르크 전 대통령을 빼고는 반인륜적 인종정책에 대해 사과한 전임 대통령이 없다는 것도 청와대가 아는지 궁금하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흑인 탄압으로 악명 높던 P W 보타 전 대통령은 “공산 혁명세력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투쟁”이라며 사면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만델라를 배출한 흑인정당 아프리카민족회의(ANC)만 26년째 독재하는 나라에서 국민 화합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제이컵 주마 전 대통령은 과거 무장투쟁 때부터 끈끈했던 ANC-기업-노조의 부패 네트워크를 통해 법과 제도와 국고를 말아먹다 특별위원회 앞에 서기도 했다. 남아공 최대 부호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 역시 부패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무리 진실-화해를 잘 해도 현재의 집권세력이 폐단을 쌓으면 ‘크리넥스 공청회’만 무한반복할 판이다.

K방역에 자부심을 감추지 않는 청와대는 K과거사청산의 진가를 볼 필요가 있다. 광주 민중항쟁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2017년 개정판엔 “세계의 학자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과거청산의 대표적인 모범 사례라고 말했다”고 나와 있다. 남미나 남아공 등지에선 과거청산작업이 부분적으로밖에 이뤄지지 않은 반면 우리나라에선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회복, 피해보상, 기념사업 등 광주문제 해결 5대 원칙이 모두 관철됐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새 위원회가 출범했으니 출범선언문대로 신념과 다른 사실이 발견되면 주저 없이 사실 앞에 무릎 꿇기 바란다. 진실 확인을 통해 보통 통합도 아닌 ‘정의로운 국민통합’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원하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송선태 위원장은 발포 명령자로 전두환 조사를 시사했다. 단기기억상실 증세가 있다는 그가 진실 고백을 못할 것을 예상해 일각에선 미국 백악관 책임을 거론한다. 어쩌면 우리는 1980년대 같은 반미운동 속에 2022년 대선을 치를 수도 있다. ,
 
김순덕 대기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