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1·2/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전미연 옮김/각400쪽·1만4800원·열린책들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있는 수많은 문들.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 소설 ‘기억’에서는 이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의 전생을 마주하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내키지 않지만 분위기에 떠밀려 무대 위에 세워진 르네는 전생이라는 무의식의 심층 기억으로 도달하게 해주겠다는 오팔의 안내에 따라 영 마뜩잖고 못 미더운 기분으로 최면에 참여한다. 이 평범한 유람선 위에서의 저녁이 어떤 후폭풍을 부르게 될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는 ‘가장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전생을 엿보고 싶다고 말한다. 빨간색 불이 켜진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독일군과의 대치를 앞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펼쳐진다.
자신의 끔찍한 죽음을 목도한 상황에서 르네는 충격으로 갑자기 눈을 뜬다. 최면에서 갑작스레 깨어난 그에게 그때부터 현실과 최면이 뒤섞이는 극심한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착란 때문에 우발적 살인까지 저지른 그는 경찰에 쫓기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팔과 함께 전생으로 가는 다른 문들을 열기 시작한다. 이미 한번 알게 된 전생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다른 긍정적인 기억으로 병적 효과를 약화시킬 수는 있다는 설명 때문이다.
르네가 기억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면서 소설은 시대와 배경을 넘나들며 스펙터클해진다. 아틀란티스라는 전설 속 섬에 사는 남자 게브를 비롯해 고성에 사는 백작부인, 고대 로마의 갤리선 노잡이, 캄보디아 승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르네들’이 출연한다. 그를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체포하려는 현생의 사람들과 수많은 전생의 ‘나’를 만나며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가는 르네의 모험이 한 편의 영화처럼 유머러스하면서도 몰입도 높게 펼쳐진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 출간됐다. 원제 ‘판도라의 상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