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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향기]‘111개 전생’이 만들어낸 지금의 나

입력 | 2020-05-30 03:00:00

◇기억1·2/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전미연 옮김/각400쪽·1만4800원·열린책들




무의식의 세계 속에 있는 수많은 문들.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 소설 ‘기억’에서는 이 문을 열 때마다 자신의 전생을 마주하게 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중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일하고 있는 르네는 매주 일요일 저녁 관례대로 동료인 엘로디와 함께 공연을 구경하러 간다. 그들이 보기로 선택한 것은 유람선에서 진행되는 ‘최면과 잊힌 기억들’이라는 공연. 오팔이라는 최면술사가 마지막 순서에 관객 가운데 한 사람을 무대로 불러내 새로운 실험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하필이면 르네가 낙점된다.

내키지 않지만 분위기에 떠밀려 무대 위에 세워진 르네는 전생이라는 무의식의 심층 기억으로 도달하게 해주겠다는 오팔의 안내에 따라 영 마뜩잖고 못 미더운 기분으로 최면에 참여한다. 이 평범한 유람선 위에서의 저녁이 어떤 후폭풍을 부르게 될지는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말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국 작가로 꼽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작은 사진)의 신작 장편소설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적 심층부에 있는 전생의 기억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상식의 세계에서 전생이나 전생 체험은 ‘신비주의’ ‘가짜 기억’ 혹은 ‘정신착란’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베르베르는 한 사람이 가진 수많은 전생의 기억들이야말로 그의 진짜 정체성과 인류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 낼 수 있는 통로라는 독창적인 상상력에 착안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오팔의 안내대로 전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무의식의 문을 여는 데까지 성공한 르네. 그에게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 통로 옆으로 흰색의 수많은 문이 보인다. 각 방은 모두 르네가 살아온 전생으로 통하는 문이다. 방문은 111번까지 번호가 달려 있다. 이번 생이 그에게 112번째란 뜻.

그는 ‘가장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전생을 엿보고 싶다고 말한다. 빨간색 불이 켜진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독일군과의 대치를 앞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펼쳐진다.

자신의 끔찍한 죽음을 목도한 상황에서 르네는 충격으로 갑자기 눈을 뜬다. 최면에서 갑작스레 깨어난 그에게 그때부터 현실과 최면이 뒤섞이는 극심한 혼란이 찾아오기 시작한다. 착란 때문에 우발적 살인까지 저지른 그는 경찰에 쫓기면서 자신에게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팔과 함께 전생으로 가는 다른 문들을 열기 시작한다. 이미 한번 알게 된 전생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지만 다른 긍정적인 기억으로 병적 효과를 약화시킬 수는 있다는 설명 때문이다.

르네가 기억의 문을 본격적으로 열면서 소설은 시대와 배경을 넘나들며 스펙터클해진다. 아틀란티스라는 전설 속 섬에 사는 남자 게브를 비롯해 고성에 사는 백작부인, 고대 로마의 갤리선 노잡이, 캄보디아 승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르네들’이 출연한다. 그를 정신병자로 규정하고 체포하려는 현생의 사람들과 수많은 전생의 ‘나’를 만나며 역사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가는 르네의 모험이 한 편의 영화처럼 유머러스하면서도 몰입도 높게 펼쳐진다. 프랑스에서는 2018년 출간됐다. 원제 ‘판도라의 상자’.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